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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 역사칼럼

2015.03.06 Views 3337 관리자

김정형 역사칼럼
 
2015년 03월 05일 (목) 10:37:29 뉴스메이커 webmaster@newsmaker.or.kr
 

■헨리 키신저
2016년 대권을 꿈꾸는 공화당의 잠룡(潛龍) 중 한 명인 릭 페리 전 텍사스 주지사가 최근 트위터에 글을 올렸다. “정말 영광이었다. 키신저 박사를 만나 미국 외교가 직면한 도전들에 대한 고견을 들었다.” 최근 실시한 아이오와주(州) 공화당원 유권자 선호도에서 15% 지지를 얻어 선두로 치고 나온 스콧 워커 위스콘신 주지사, 마르코 루비오 연방 상원의원(플로리다주), 크리스 크리스티 뉴저지 주지사도 마찬가지였다. 외교에 관해서라면 어떤 유명 정치 인사라도 만나려 하는 인물이 바로 ‘외교의 제왕’으로 불리는 헨리 키신저(92) 전 국무장관이다. 리처드 닉슨,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외교안보 보좌관과 국무장관을 지낸 그는 1977년 국무장관을 끝으로 외교 현장에서는 물러났지만, 막후에서는 계속 황제였다. 지난 1월 29일에도 존 매케인 연방 상원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는 군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미국 대외 정책에 대해 조언하는 등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조선일보 2015년 2월 6일>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1923~ )가 미국 외교의 전권을 틀어쥐기 시작한 것은 1968년 12월 2일 닉슨(1913~1994) 대통령 당선자에 의해 국가안보담당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고부터였다. 이후 “닉슨 없는 키신저 없고 키신저 없는 닉슨 없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둘은 밀착했다. 심지어 닉슨을 두고 ‘키신저의 또 다른 얼굴’이라거나 닉슨 정부를 가리켜 ‘닉슨?키신저 공동정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키신저는 독일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1938년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였다. 명석한 유대인 이민 자녀들의 집합소였던 뉴욕시립대 야간부에 입학해 밤에는 회계학을 공부하고 낮에는 돈을 벌었다. 그러던 중 1943년 입대한 군에서 만난 16살 연상의 프리츠 크래머 이등병을 통해 자신이 훌륭한 정치적 두뇌의 소유자임을 알게 되자 그때까지의 목표였던 공인회계사 대신 학구적인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설정했다.
키신저는 1946년 제대 후 하버드대에 입학해 철학과 외교를 전공했다. 주요 연구대상은 19세기 유럽 세력 균형의 외교를 주도했던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메테르니히였다. 1954년 박사학위를 받고 1957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핵무기와 외교정책’이라는 명저를 써 언론과 외교정책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4주 동안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책의 성공으로 키신저는 외교가에 이름을 떨치고 정치의 계단으로 한 걸음 더 접근했다.
1958년에는 하버드대 교수가 되었고, 1961년엔 케네디 정부에서 외교 보좌관을 맡았다. 그러나 케네디 정부에서 뜻을 펼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자 1962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케네디 정부와 인연을 끊었다. 이후 존슨 정부로부터 베트남전을 현지에서 분석 평가하는 임무를 맡아 1965년부터 3년 동안 베트남 현지를 드나들면서 베트남에 정통한 전문가가 되었다. 이때 만들어진 인맥과 비밀 외교채널은 장차 닉슨 대통령의 밀사로 미국과 북베트남 간의 직접 회담을 주도하는 발판이 되었다.
키신저가 외교에 관한 실무 경험을 넓히는 동안 닉슨은 1960년 케네디와의 대통령 선거 대결에서 패하고 1962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1968년 닉슨이 또다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쟁에 뛰어들었을 때 키신저는 닉슨의 공화당 내 경쟁자인 넬슨 록펠러의 외교정책담당 수석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공화당 내 선거운동 기간 중 키신저는 닉슨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닉슨은 록펠러를 물리치고 공화당의 후보가 되어 1968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키신저가 닉슨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것과 달리 닉슨은 수년 전부터 키신저의 저서와 사고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60년 케네디와 대통령 선거전을 벌일 때도 키신저에게 외교문제 보좌관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그런데도 닉슨은 1968년 11월 대통령에 당선되자 또다시 키신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키신저는 닉슨을 정치적으로는 불순하고 지적으로는 2류 이하의 인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닉슨의 요청을 받아들여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그 무렵은 “자유를 지키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적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미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미소 냉전기였다. 하지만 키신저는 편견이 없고 과거의 잘못에 구애받지 않는 실용주의자였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힘과 힘의 조화에 의한 세계질서의 창조’였지 ‘무력에 의한 강제’가 아니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대결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은 이데올로기가 외교에 개입해서도 안된다고 믿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닉슨과 달리 키신저는 탈이데올로기적인 외교를 지향했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두 사람 간의 정치적 견해가 날카롭게 대립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닉슨이 점차 키신저에게 설득당하면서 외교에 관한 한 키신저의 독무대가 되었다. 키신저의 외교 전략은 첫째도 국익, 둘째도 국익이었다. 평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긴다”는 말을 즐겨 사용한 데서 알 수 있듯 키신저는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는지를 늘 의식하며 행동했다.

잠행 비밀외교는 트레이드 마크
잠행 비밀외교는 키신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1969년 8월 파리 근교에서 레둑토 북베트남 측 대표와 비밀협상을 할 때도 비행기를 수 차례 바꿔 타며 파리에 도착하는 잠행을 보였고, 1971년 7월 첫 중국 방문도 미국의 부통령과 국방장관조차 모르게 완벽한 비밀로 성사시켰다. 중국 방문 후 파리로 날아가서도 공개적으로 CBS 방송 프로듀서와 데이트를 즐기는 것처럼 해 보도진을 방심하게 해놓고는 파리에 와 있던 북베트남 대표와 비밀리에 만나 교착상태에 빠져 있던 문제들을 타결지었다.
1972년 4월의 모스크바 방문도 007 작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했다. 그가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 백악관은 키신저가 대통령의 별장에서 닉슨과 함께 주말을 보내고 있다고 발표해 키신저의 모스크바 방문을 감쪽같이 숨겼다. 닉슨이 별장을 떠날 때 키신저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는 모습을 공개함으로써 키신저는 지난 5일 동안 국내에 있었던 사람이 되었다.
이런 잠행외교를 통해 중국과는 1971년 7월 핑퐁외교를 성사시켰고 소련과는 1972년 5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체결하도록 해 미·소 간 데탕트를 완수했으며 1973년 1월 27일엔 북베트남과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해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미모의 여성들과 벌인 염문도 늘 화제를 뿌렸다. 워싱턴이나 해외 여행길에서 종종 미모의 아가씨들과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사실은 비밀행적을 감추기 위한 연막작전의 일환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이유가 무엇이든 그의 주변엔 늘 007 영화 주인공, 탤런트, 모델 등 다양한 여성들이 줄을 지었다. 1973년 8월 국무장관이 되고 1974년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후임 대통령 포드와 호흡을 맞추며 계속 국무장관직을 유지하다 1977년 1월 포드가 물러날 때 함께 물러났다.
오늘날 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미소 데탕트와 미·중 관계 정상화를 실현한 ‘20세기 최고의 외교전략가’, ‘살아 있는 외교 교과서’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약소국쯤은 쉽게 짓밟아버리는 책략가라는 평가도 있다. 베트남전 평화협상을 고의로 지연시켜 많은 양민을 죽음으로 내몰고,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려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수립을 돕는 등 국제적으로 많은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직지심체요절
‘직지(直指)’를 뛰어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문화재청이 6년째 진위 논란이 일고 있는 ‘증도가자’(證道歌字)에 대해 2월 12일 국가문화재 지정을 위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정부가 직접 조사해 진품이라는 판단이 서면 국보나 보물로 지정하겠다는 얘기다. ‘증도가자’는 2010년 9월에 처음 존재가 알려졌다. 고미술상 김종춘씨가 소장하고 있던 활자들을 경북대 남권희(문헌정보학) 교수가 분석해 1377년에 제작된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보다 적어도 138년 이상 앞서 만들어진 활자라고 주장했다. 사실로 공인될 경우 세계 인쇄사를 다시 써야 할, 파장 큰 주장이었다. <중앙일보 2015년 2월 13일>

   
▲ 직지심체요절
1955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박병선(1929~2011)이 소르본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고 근무를 시작한 곳은 파리 국립도서관이었다. 1967년 어느날 박병선은 도서관 내 동양문헌실에서 표지에 한자로 ‘直旨(직지)’라고 쓰인 작은 책(가로 17cm, 세로 24.6cm) 한 권을 발견했다. 표지에는 누군가 프랑스어로 갈겨 쓴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던 박병선이 주목한 것은 책의 맨 뒷장 간기에 적힌 ‘선광칠년정사칠월일 청주목외흥덕사 주자인시(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 鑄字印施)’라는 글귀였다. 해석을 하면 ‘우왕 3년(1377년)에 청주목 교외의 흥덕사에서 주조된 금속활자로 찍은 책’이라는 뜻이었다. 만약 글이 사실이라면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고 있는, 구텐베르크가 1450년대에 간행한 ‘42행 성서’보다 70여 년이나 앞서 인쇄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실 1901년 프랑스 외교관 모리스 쿠랑이 펴낸 ‘한국 서지’에도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어떤 금속활자본보다 빠른 것’이라고 ‘직지’가 소개되어 있기 때문에 ‘직지’가 실물로 존재할 가능성은 높았다. 다만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를 몰랐던 것인데 박병선이 ‘직지’의 소재를 찾아낸 것이다.
박병선의 정밀한 고증 끝에 진본으로 확인된 ‘직지’의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 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 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호가 백운인 고려 말 경한 선사가 1372년 역대 불조(佛祖)들의 법어와 설법 등에서 선(禪)의 요체를 깨닫는데 필요한 내용을 뽑아 상하 2권으로 엮은 책을, 경한 선사가 입적한 후인 1377년 7월 비구니 묘덕 스님과 경한 선사의 제자인 석찬과 달장 등이 힘을 합쳐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찍어낸 것이다. 이를 줄여서 ‘직지심체요절’, ‘직지심체’, ‘직지’ 등으로 부를 수는 있지만 ‘직지심경’이라는 약칭은 잘못된 표현이다. ‘경(經)’은 불교경전을 뜻하는데 ‘직지’는 불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때는 ‘불조직지심체요절’로 기록되었다.
책의 중심 주제는 ‘직지심’으로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의 불도를 깨닫는 명귀에서 따온 것이다. ‘참선을 통하여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볼 때 그 마음의 심성이 곧 부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있어야 할 ‘직지’가 무슨 이유로 멀리 프랑스 파리에까지 간 것일까? 해답의 열쇠는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후 부임한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초대 주한 대리공사가 쥐고 있었다.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조선 부임 후 공사관 앞에 고서를 산다는 방을 써 붙일 정도로 책 수집에 열중했다.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이런 과정을 거쳐 ‘직지’가 플랑시의 손에 들어가 프랑스로 넘어간 것으로 보이지만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플랑시가 직지를 입수한 뒤 표지에 ‘1377년 인쇄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라고 펜으로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직지’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직지’는 1907년 플랑시에 의해 프랑스로 건너가 1911년 고서 경매를 거쳐 당대의 부유한 보석상이자 고서 수집가인 앙리 베베르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1943년 수집가가 숨지자 그의 유언에 따라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되었다. 현재는 도서번호 109번, 기증번호 9832번을 단 채 동양문헌실에 보관되어 있다.
직지 상하권 중 하권만 발견되고 첫 장은 결락된 상태였지만 하권 마지막 장에 시기를 유추할 수 있는 ‘선광칠년(宣光七年)…’이 명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권 발견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더 다행인 것은 직지를 인쇄하고 1년 뒤 우왕 4년(1378년) 6월에 ‘직지’ 금속활자본과 똑같은 목판본 상하 양권이 경기 여주의 취암사에서 간행되어 지금도 국내 세 곳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직지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게 된 것도 이 목판본 덕분이다.
‘직지’의 고증이 끝나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측은 1972년 5월부터 10월까지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주최 ‘책의 역사전’에 ‘직지’를 전시하면서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고 발표했다. 세계가 놀라는 가운데 우리나라 전문가들도 파리로 달려가 실물을 보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해 12월 박병선 박사가 가져온 영인본을 감정한 끝에 한국서지학회가 12월 28일 금속활자본임을 최종 확인함으로써 우리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를 만든 문화국가임을 자부할 수 있었다.
‘직지’가 구텐베르크보다 70여 년 먼저 인쇄되었다는 점에서 세계 최고인 것은 분명하지만 인류에 끼친 영향면에서는 구텐베르크와 비교될 수 없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직지’ 하권의 인쇄면수가 39장(78쪽)에 불과하고 목판활자가 섞여 인쇄되었으며 인쇄 부수도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에 비해, 1452~1456년 완성된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는 인쇄면수가 1280면이나 되고 발행부수도 약 200부(그중 30부는 양피지)에 달하는 데다 현재도 48부가 세계 주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이 개발된 후 반세기도 안되어 유럽 20여 개 도시에서 약 3만5000종의 책이 찍혀 나와 가히 지식의 대량보급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직지심체요절’을 인쇄한 흥덕사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1985년 청주시 흥덕구 운천동 택지개발 중에 확인되었다. 운천동 866번지 흙 속에서 ‘서원부 흥덕사’라고 새겨진 쇠북과 ‘황룡십년 흥덕사’라고 새겨진 큰 그릇 뚜껑이 나온 것이다.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직지’를 등재시킴으로써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공인받았다. 

■맬컴X
2월 21일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 맬컴X 피살 50주년을 기념하는 추모행사가 피살현장인 뉴욕 맨해튼 북부의 맬컴X 부부 기념관에서 열렸다. 맬컴X 피살 현장인 ‘오두본 볼룸’은 2005년 ‘맬컴X와 베티 샤바즈 박사 기념 및 교육센터’로 탈바꿈했다. 이날 추모행사에서는 푸른색 조명이 맬컴X의 피살 지점을 비췄고 맬컴X의 모습을 담은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했다. 맬컴X의 딸인 일라야사 샤바즈는 이날 연설에서 “아버지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 젊은이였다”고 말했다. 맬컴X는 39세이던 1965년 2월 21일 오두본 볼룸에서 연설을 준비하던 중 탈퇴한 이슬람 단체 ‘네이션 오브 이슬람’ 회원들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연합뉴스 2015년 2월 22일>

   
▲ 맬컴x
1959년 7월, TV 다큐멘터리 ‘증오가 부르는 증오’에서 맬컴X(1925~1965)가 “백인은 악마!”라며 증오와 저주를 토해냈다. 방송을 본 백인들은 물론 흑백통합을 주장해 온 흑인 민권운동가들까지 맬컴X를 “흑인 파시스트”, “증오를 가르치는 자”라며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비폭력으로 흑인의 지위를 향상하고 흑백차별 철폐를 주장하는 공민권 운동 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알고 있던 때에 “인종주의자가 사라지지 않는 한 폭력을 포기할 수 없다”며 폭력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맬컴X의 등장은 소수의 도시빈민 흑인들을 제외하고는 흑인과 백인 대부분을 당혹케 했다.
그러나 맬컴의 성장기를 생각하면 맬컴의 이런 모습은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마커스 가비의 운동에 깊이 관여하던 침례교 목사 아버지는 그가 6살 때 KKK단에 살해되었고, 스코틀랜드계 백인 외할아버지가 흑인 외할머니를 겁탈해 태어난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은 후 미쳐 정신병원에 갇혔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맬컴의 성장기 역시 가난과 굶주림에 찌든 여느 빈민가의 흑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서 태어나 9살 때 도둑질을 하고 13살 때 감화원 생활을 했으며 중학교 중퇴 후에는 보스턴에서 나이트클럽 구두닦이, 접시닦이 등을 전전했다. 17살 때 이주한 뉴욕 할렘에서는 갱단에 가입하고, 마약을 팔고, 강도짓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946년 백인 주택을 털다가 절도죄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어느 날 면회를 온 형을 통해 ‘이슬람 국가’라는 단체를 이끌고 있는 엘리야 무하마드를 알게 되었다. 형으로부터 전해들은 무하마드의 설교는 충격적이었다. 이후 맬컴은 술, 담배, 마약을 끊었다. 희미한 복도 불빛 아래서 지독한 난시가 될 정도로 책을 읽었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흑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1952년 가석방으로 풀려나고 엘리야를 만나 깊이 감화된 맬컴은 뿌리를 확인할 수 없는 노예의 후손임을 잊지 않기 위해 백인 냄새가 나는 ‘리틀’이라는 성을 버리고 ‘맬컴X’로 이름을 바꾸었다. 맬컴은 강력한 카리스마와 호소력있는 스피치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 ‘이슬람 국가’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9년 TV 출연 후 맬컴은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어 각종 사회·정치적 이슈에 관해 신문, 잡지, 방송 등을 통해 견해를 밝히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도 주목을 받았다.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초, 미국이 온통 인종문제로 들끓고 있을 때 맬컴은 비폭력을 주창하는 마틴 루터 킹과 대조를 이루면서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랐다.

흑인운동의 또 다른 대안으로 떠올라
그러나 통합을 통해 인종문제 해결을 추구한 마틴 루터 킹 방식의 흑인민권운동이 소수의 인종주의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백인과 흑인들로부터 공감을 얻은 것과 달리, 분리를 통해 흑백문제를 해결하려 한 맬컴의 운동방식은 소수의 가난한 흑인을 제외한 모든 미국인으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맬컴은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킹 목사의 연설로 유명한 1963년 8월의 워싱턴대행진을 두고는 “얼간이 행진”, “백인광대와 흑인광대가 함께 출연한 소풍이자 서커스”라며 비아냥댔다. 킹에 대해서는 “백인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20세기의 샘 아저씨”라고 조롱했다. 심지어 케네디의 피살에 대해서도 “자업자득”이라고 논평해 백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연설과 폭넓은 지식 덕에 맬컴은 자주 매스컴에 등장하고, 그때마다 관심과 비난과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전국 50개 대학에서 한 강연 후에는 전국 대학생 여론조사에서 두 번째로 인기가 높은 인물로 부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인기가 치솟자 ‘이슬람 국가’의 1인자 무하마드가 맬컴을 질시하며 멀리하기 시작했다. 위태롭던 둘의 관계는 1963년 7월 무하마드가 2명의 비서와 불륜관계를 맺어 4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깨졌다. 맬컴의 투쟁방식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맬컴은 무하마드의 도덕성에 환멸을 느끼고 1964년 3월 8일 공식적으로 엘리야 무하마드의 ‘이슬람 국가’와 결별을 선언했다.
맬컴은 1964년 4월 이슬람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를 순례한 후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그에게 백인은 더 이상 ‘악마’가 아니라 때로는 협력할 수도 있고 결국 평화롭게 공존해야 할 ‘인간’이었다. 백인들 개개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버리고, 마틴 루터 킹의 접근방식도 수단은 다르나 목표가 같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지순례를 계기로 맬컴은 수니파 무슬림이 되었고 엘 하지 말리크 엘 샤바즈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회교사원을 설립하고 자신이 결성한 아프로·아메리카통일기구(OAAU)를 이끌면서 미국 전역과 해외 각국을 순방하며 흑인의 동포애와 인종 간 평화를 역설했다. 그러자 ‘이슬람 국가’ 측이 맬컴에 대해 공공연히 위협을 가했다. 엘리야 무하마드는 “맬컴은 목이 잘려야 마땅하다”고 했고 ‘이슬람 국가’ 매체는 맬컴의 잘린 목이 튀어다니는 카툰을 실었다.
결국 1965년 2월 21일, 뉴욕 할렘의 오두본 볼룸에서 열린 OAAU 연설 도중 3명의 무하마드 조직원이 쏜 16발의 총탄을 맞고 40세로 절명했다. 변화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전에 쓰러져 맬컴은 지금까지도 증오와 갈등과 분노의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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