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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주석이 1박 2일의 일정으로 방한 하였습니다.
2014.07.04 Views 2691 관리자
시진핑 주석이 1박 2일의 일정으로 방한 하였습니다.
방한일정 :
3일(첫날)
- 박대통령과 청와대에서 정상회담을 가진 후 공동기자회견을 진행
4일(둘쨋날)
- 국회 방문
- 서울대학교에서 한중 관계의 미래비전에 대한 강연
서울대 글로벌 공학교육센터에서 이뤄질 강연은
방한 기간 내 유일한 대중 연설 일정으로 중국 칭화대 화공과 출신인 시 주석이 직접 서울대 공대에서 강연하고자 하는 의지를 밝혔다고 한다.
이번 방한으로 인해, 시진핑 주석에 대한 궁금한 점이 많으실 듯 해서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의 삶에 대해 키워드를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시진핑. 그가 처음부터 중국의 주석이 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시진핑에게는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인생역정 스토리가 존재한다. 황토고원부터 중난하이까지, 바닥 같은 어려운 환경에서부터 한 걸음씩 올라가 지금의 명성과 권력을 쥐게 된 시진핑이 걸어온 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성공신화 그 자체이자, 중국 현대사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명문의 후예]

1953년 6월, 중국공산당 중앙선전부(中央宣傳部) 부장이자 정무원(政務院) 문교위원회(文敎委員會) 부주임인 시중쉰(習仲勳)과 그의 부인 치신(齊心)의 아들이 베이징(北京)에서 태어났다. 시중쉰은 불혹의 나이에 얻은 이 귀한 아들에게 `진핑(近平)`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함축된 의미가 자못 깊은 이름이다.
[옌안 생산대 입대]
1969년 초, 정확히 말하자면 1월 9일과 17일, 5,000명에 이르는 전후 두 무리의 지식청년들이 기세 드높은 사회의 거대한 조류에 말려 산시 북부의 황량한 황토고원(黃土高原)으로 갔다. 이제 막 초급중학교(初級中學校)를 졸업한 시진핑도 그 중 한 명으로 당시 채 16살이 되지 않은 나이였다.
[다시 베이징으로]
1975년 가을, 22살의 시진핑은 칭화대학교 화공과에 입학하여 기초유기합성을 전공하기 위해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그와 같이 화공과에 입학한 사람으로는 푸젠에서 온 `지식청년` 천시(陳希)가 있었다. 천시는 대학을 졸업한 후 계속하여 연구생(硏究生)65 이 되어 학교에 남아 당 업무에 종사하였으며,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가 스탠퍼드 대학교 방문학자가 된 바 있다. 현재 중국공산당 칭화대학교위원회 서기이며, 제17기 중국공산당 중앙 후보위원이기도 하다.
칭화대학교 화공화는 정계의 유명한 교우를 많이 배출하였다. 제17기의 유일한 중앙정치국 여성위원인 류옌둥(劉延東, 1970년 졸업) 외에도 초창기 교우로 장하오뤄[張晧若, 1952년 졸업, 전 쓰촨성장(四川省長)], 텅텅(滕藤, 1951년 졸업, 전 국가교육위원회 부주임), 천쓰넝[陳四能, 1964년 졸업, 전 구이저우성장(貴州省長)], 리쯔빈[李子彬, 1964년 졸업, 전 선전시장(深圳市長)] 등을 꼽을 수 있다.
[정딩현에서의 경험]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몸을 피곤하게 하며, 배고프게 하고, 몸을 궁핍하게 한다."
1982년 3월, 28살의 시진핑은 의연한 태도로 베이징의 친척 및 친구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허베이로 가서 경험과 수련을 쌓았다. 그는 원래 한 현의 인민공사(人民公社)에 가서 당위원회 서기를 맡게 해달라고 주동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허베이성위원회 제1서기 진밍(金明)은 감히 쌀쌀맞게 대하지 못하고 곧바로 그를 중국공산당 정딩현위원회 부서기에 배치하였다.
[백로 섬의 풍운]

"내 인생의 아름다운 청춘 시절은 푸젠성에서 보냈다." 동남 연해의 샤먼 경제특구에 도착한 그날은 바로 시진핑의 서른두 번째 생일이었다. 백로 섬(鷺島)이란 별칭을 가진 샤먼은 시진핑이 푸젠에서 업무를 수행한 첫 번째 지역이었다. 그 후 그는 닝더(寧德)지구위원회 서기, 푸저우시위원회 서기, 푸젠성 부서기, 푸젠성장을 역임하는 등 푸젠에서 꼬박 17년 반 동안 일하였다.
[닝더에서 이름을 날리며]
후야오방이 퇴진한 후 비록 아버지 시중쉰은 정치상 이미 한직에 있었으나 이 고위 간부인 아들의 벼슬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1988년 5월, 35살의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푸젠성 닝더지구(寧德地區)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어 부청급(副廳級)에서 정청급(正廳級)으로 승진하여 한 지역의 업무를 주관하게 되었다.
[용나무 도시의 주인]

1990년 5월, 시진핑은 중국공산당 푸저우시위원회 서기로 승진하였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37살에 불과하였다. 푸저우는 옛날 룽청(榕城)167 으로 불렸던 곳으로 푸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고 샤먼과 함께 푸젠성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의 하나였다. 일반 관리에게 있어 빈곤한 지역인 닝더에서 겨우 수박 겉핥기식으로 2년간 일을 한 후에 곧바로 이 성의 성도(省都)인 푸저우의 정무를 주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푸젠성장]
시진핑은 푸저우시위원회 서기 자리에 꼬박 6년간을 앉아 있었다. 마지막 1년은 성위원회 부서기 겸 시위원회 서기로 있었다. 1996년 그는 푸젠성위원회 부서기를 맡고 있었고, 농업 및 당무 등의 업무를 주관하였다. 그를 이어 푸저우시위원회 서기를 지낸 사람은 성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장이던 자오쉐민(趙學敏)이었다.
[저장(浙江)]
2002년 10월 10일,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기 약 한 달 전 시진핑은 중앙의 전근명령을 받아 급히 항저우로 가서 저장성위원회 부서기에 취임하였고, 성장 대리로 지명되었다. 정말로 드라마틱한 것은 이 임명이 하달된 후 40일이 채 지나지 않아 중국공산당 제16차 전국대표대회가 폐막된 지 5일 후, 49살의 시진핑은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하여 광둥성위원회 서기로 전보된 장더장(張德江)의 자리를 이어받아 저장성위원회 서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47살의 허난성장 리커창도 중국사회과학원 원장인 천쿠이위안(陳奎元)의 자리를 이어받아 허난성위원회 서기로 승진하였다.
[상하이]
2006년은 중국 제1의 도시 상하이가 광풍과 폭우의 세례를 받았던 한 해로, 번화한 대(大)상하이가 후진타오와 장쩌민 간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정치투쟁의 각축장이 되었던 것이다.
[황태자]
2007년 9월, 중국공산당 제17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기 한 달 전만 해도 시진핑을 후진타오의 후계자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고, 후진타오의 `좋은학생`인 랴오닝성위원회 서기 리커창이 좀 더 잘 되리라고 예측하였다.
[홍콩・마카오의 대집사]
시진핑의 정치국 상무위원 당선은 홍콩・마카오의 정치 및 경제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5년 후 그가 후진타오의 후계자가 될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외에도 그는 쩡칭훙이 주관하던 당무를 이어받을 뿐만 아니라 중앙 홍콩・마카오 업무조정소조 조장을 겸임하여 중국공산당의 홍콩・마카오 대집사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시진핑의 가족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시진핑은 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을 부인으로 두고 있다. 붉은빛으로 가득한 중국 대지의 이 군대(軍隊) 가수는 `중국 당대 민족 성악323 의 대표자, 중국인민해방군 최연소 문관(文官) 장군`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는데 그 긍정적인 이미지로 남편의 지명도를 크게 높였고, 남편이 정계에서 교제를 하는 데 도움을 줌과 동시에 시진핑이 군부의 지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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