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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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인 듯 북한 아닌 북한 같은 소니 해킹
2014.12.23 Views 2044 관리자
[배명복 칼럼] 북한인 듯 북한 아닌 북한 같은 소니 해킹
배명복논설위원·순회특파원
자칭 ‘평화의 수호자(GOP)’라는 해커들의 공격으로 소니가 쑥대밭이 된 것은 지난달 말. 회사 전산망이 다운되고, 할리우드의 유명 인사와 전·현직 임직원 등 4만7000명의 개인정보와 미개봉 영화 5편의 동영상 파일이 유출됐다. 임직원이 주고받은 e메일도 예외는 아니다. 소니의 공동대표인 에이미 파스칼은 톱스타 앤젤리나 졸리에 대해 ‘실력 없는 싸가지’니 ‘얼굴마담’이니 하며 뒷담화를 한 사실이 드러나 곤경에 처했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몰래 호텔을 예약할 때 사용하는 가명 리스트도 공개됐다. 소니 스튜디오에 투하된 사이버 폭탄 한 방에 할리우드 전체가 아수라장이 됐다.

소니를 공격한 배후가 정말로 북한이라면 북한은 미국에 제대로 한 방 먹였다고 볼 수 있다. 진짜 핵무기를 쓰지 않더라도 머리만 잘 쓰면 돈도 안 들이고, 증거도 안 남기면서 핵무기급 펀치를 날릴 수 있음을 보여준 셈이다. 물론 북한은 발뺌하고 있다. 증거를 내놓으라고 되레 큰소리치며 미국에 공동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 FBI의 수사 결과 발표문에 ‘증거’란 표현은 한마디도 없다. 악성코드와 범행 수법의 유사성 등 여러 ‘정보’에 비추어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짓기에 충분하다고 돼 있을 뿐이다. 북한 소행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안 하기도 그런 애매한 상황이다.
사이버 공격은 증거를 찾기 어렵다. 국가 간 사이버 공격이 종종 있었지만 명확하게 진상이 밝혀진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유야무야 넘어갔다. 미국이 이번처럼 특정 국가를 공격의 배후로 지목한 것은 처음이다. 오바마는 이번 사태를 국가안보의 문제로 규정하고 엄중한 대응 방침을 천명했다. 미국의 자존심인 할리우드 영화 산업에 대한 직접 공격도 공격이지만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가치가 깡패국가 독재자 손에 훼손됐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위협에 한번 굴복하면 계속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확실한 증거도 없이 정황정보만으로 북한에 죄를 묻는 것은 혐의만 갖고 피의자를 처벌하는 꼴이다. 법치를 강조하는 미국이 할 일은 아니다. 뉴욕타임스가 사설에서 독립적 국제조사단에 조사를 맡기고, 처벌은 그 결과에 따르자고 주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일 것이다. 천안함 폭침 사건 때도 한국은 국제조사단을 구성했다. 북한이 요구하는 공동조사도 말이 안 된다. 피의자가 수사에 참여하겠다는 꼴이다.
소니가 백기투항하던 날, 미국은 쿠바와 53년 만의 역사적 수교를 선언했다. 핵과 장거리 미사일이 없는 쿠바는 물론 북한과 다르다. 그렇더라로 제재 일변도의 압박정책만으로 상호이익을 도모할 수 없다는 교훈은 북한에도 똑같이 적용돼야 한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것은 사태를 냉정하게 보고, 슬기롭게 풀어가는 대국다운 지혜와 신중함이다. 저질 코미디 한 편에서 촉발된 이번 사태가 북·미 간 극한대결로 치닫는 것이야말로 진짜 코미디다. 소니 해킹 사태에도 불구하고 쿠바 다음은 북한일 수 있다는 기대가 꺾여서는 안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