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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1월호 안보논단 `한일 군사교류는 위기관리를 우선해야`

2015.02.02 Views 2082 관리자

한일 군사교류는 위기관리를 우선해야
-6.25전쟁 시 미일관계 중심으로-

이 종 판
한국미래문제연구원 국제학 박사 

올해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

1965년의 한일수교는 고박정희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었다. 국내의 완강한 반대여론, 국민의 생활수준은 북한보다 훨씬 떨어져 있었던 현실, 베트남전 파병문제 등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군인생활을 통해 채득한 특유의 리더십을 발휘했을 것으로 여긴다. 이후 652.2억 달라에 불과했던 교역 규모가 2013년 기준 947억 달라로 431배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베정권 출범 이후 냉각된 한일관계가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올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지 두고 볼 일이다. 정치권의 냉각으로 인해 군사교류마저 단절되면 안된다. 군사교류는 위기관리를 우선 고려해야한다. 625전쟁 당시의 미국과 일본의 전략적 관계를 살펴보고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모색해 보자.

6.25전쟁시 미일의 전략적 동반 관계

미국은 6.25전쟁을 통하여 일본의 전략적가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몇가지 사례를 들면 일본이라는 발진기지를 이용 육해공의 전력이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다. 특히 미국은 전쟁지역 밖에 전쟁지도본부를 설치하여 전쟁한다. 걸프전에 쿠웨이트, 아프간전쟁에서 기리스탄을 사용했듯이, 6.25전쟁 당시는 일본이 후방전투기지 및 발진기지를 이용했기에 국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일본인은 놀라운 속도로 일본 4개 섬을 거대한 보급창고로 변화시켰다. 일본인의 선박과 철도전문가들은 그들의 숙련된 부하와 함께 한국으로 가서 미군 및 유엔군에서 활동했다. 이것은 극비사항이었다. 그러나 유엔군은 한국을 잘 알고 있었던 일본인 전문가들 수천 명의 지원이 없었다면 625전쟁에서 싸울 수 없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미국은 625전쟁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본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역할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1) 만약 일본의 지원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반도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시카고 데일리 뉴스 : 도쿄 특파원)

(2) 일본은 유엔군의 전진보급기지 및 공군의 발진기지로써 625전쟁시 전략적으로 매우 유용했음이 증명되었다.(포린폴리시 뷸레틴 : 1951. 6.22)

(3) 미국이 일본이라는 전략기지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대규모적인 개입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1951.6.23. 북한 박헌영)

(4) 당시 미8군사령관 리찌웨이 대장은 그의 회고록에서 일본에서 차량수리 및 재생, 서비스지원이 없었다면 625전쟁은 3개월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일본지원의 중요성을 기술하고 있다.

유엔군사령부에 구일본군 자문단 설치, 인천상륙작전 조언

인천상륙작전은 1950629일 한강방어선시찰시에 맥아더 구상이라고 한다. 미합참이나 상륙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한 합참에서 육해군 참모총장을 동경으로 보내서 만류시키려고 했었다. 조이 해군중장도 1/5000의 확률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반대가 심했던 작전이었다. 지휘 및 참모활동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군에서, 그리고 상부의 반대여론 속에서 독단적인 실행결심은 도박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맥아더의 결심을 굳히게 하였던 배경이 구일본군의 조언이 크게 작용하였다.

위의 2개요도에서 인천과 원산을 상륙지역으로 선정했다는 것은 청일전쟁시 일본의 구상과 같다. 일본 구군인들은 전쟁지도본부 동경제일빌딩 유엔군사령부에서 맥아더의 625전쟁 자문단이 되어 전쟁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조언했던 것이다.

일본 역시 전쟁덕분에 미군과 유엔군이 필요했던 보급물자를 생산했기 때문에 2차대전으로 파괴되었던 산업을 가장 빠른 속도로 재건할 수 있었다. 결국 이를 기반으로 지금의 경제대국이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미국과 일본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실질적인 군사적 동반관계를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의 반응

그러나 유엔군의 작전후방기지로서 일본의 역할이 국제적으로 주목되었지만 전쟁의 당사국인 한국의 대일관은 불신관계에 있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바라지 않았다.

625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한국은 일본의 재무장설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1949216일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은 당시 전략환경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일본의 재무장을 방임하면 일본은 민주주의를 포기하거나 미국의 위협이 될 것이다. (중략)미국이 일본을 포기한다면 일소(日蘇)동맹으로 미국에 대항할 가능성, 벼르고 있는 일본이 다시 세계를 정복할 기도를 고려해야하며, 과거의 군국주의자들이 미국의 적국과 합세하여 미국을 정복하려고 했던 것을 기억해야한다. 미국은 일본인의 뇌리에서 군국주의가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일본에서 미군이 철수하면 일본의 야망을 키울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공산주의 확장을 방어하기 위하여 정비를 완료한 한국에게 또 하나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일본은 38선을 통하여 우리의 세력을 시험하고 있는 공산주의 확산에 대하여 강력한 민주주의 보루로서 발전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유에 대하여 또 하나의 위협이 된다.

전쟁 이후 이승만은 주한미군의 철수문제와는 별개로 주일미군의 철수를 적극 반대하였다. 그 이유는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과 이에 수반되는 미국과의 대결, 일본과 소련과의 동맹 가능성 등으로 한국으로서는 북한의 공산주의와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배후의 일본이라는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졌던 것이다. 이승만은 일본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주일미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

이러한 한일양국의 관계 단절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625전쟁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본을 적극 활용했으며, 일본은 유엔지원을 명분으로 미국의 작전기지로서의 역할과 후방지원활동으로서 협력하였다. 625전쟁이라는 매개를 통해 미일간에는 굳건한 상호 협력관계가 형성되었다. 625전쟁 당시 일본의 대미협력활동은 오늘날의 미일협력활동의 기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 시 한일관계는 배타적이었지만 미일군사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북한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빅터 차(Victor D.,Cha)는 한일관계는 동맹은 아니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擬似(의사)동맹(quasi-alliance)까지 언급하였다. 그러나 중국 및 북한위협을 3국이 어느 정도 인식하느냐 따라서 역학구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한일군사협력은 안보 및 위기관리의 중층적(overlapping)관점에서 평가되어야한다.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다시금 한일관계를 주목해야하는 시점이 되었다. 한미일간의 삼각동맹 체계가 지금의 한반도 안보를 책임지는 중심축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정치적 입장과는 별개로 우리가 일본과 군사적 교류를 지속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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