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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기원과 도전요인 분석 및 시사점

2026.05.10 Views 53 관리자

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이론적 배경과 도전요인 분석 및 시사점


1. 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헌정적 기원과 사상적 계보

오늘날 국제정치에서 통용되는 '규칙 기반 세계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는 냉전 해체 이후 자유주의적 패권이 전 세계로 확장되면서 본격적으로 정립된 개념적 틀이다. 이 질서는 단순히 강대국의 힘의 균형에 의해 유지되는 일시적인 상태를 넘어, 제도화된 규범과 법치주의를 통해 국제사회의 영구적인 평화를 달성하려는 문명사적 기획의 결과물이다. 이러한 규범 중심적 질서의 구축 시도는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의 사회계약론,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연방안, 그리고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영구평화론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 정치철학적 논쟁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사회의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으로 규정한 홉스는 무제한적인 자연적 권리를 제3자인 통치자에게 이양하고 복종하기로 합의하는 국내적 사회계약을 통해 국가가 탄생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국가의 탄생으로 국내적 무정부 상태는 종식되는 반면, 국제사회는 개별 주권국가들이 상호 통제 장치 없이 대립하는 거대한 자연상태로 남게 된다. 이에 대해 루소는 유럽의 모든 주요 강대국을 회원국으로 하되, 공동 결의안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는 입법기관과 강력한 군사력을 구비하고 회원국의 자발적 탈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초국가적 '강제력을 갖춘 국가연합'의 설립을 평화 구현의 해법으로 제시하였다.

칸트는 이러한 루소의 급진적 연방 모델이 현실적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거대한 독재 기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이를 법적 효력(Kraft)이 없는 공상적 구상이라고 비판하였다. 칸트는 국가들이 사회계약을 맺어 주권을 완전히 반납하고 하나의 초국가적 국가를 형성하는 방식은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므로, 개별 국가들의 독립된 주권과 자유를 유지하면서도 자발적인 조약과 국제법 체제하에서 연대하는 '자유로운 국가들의 연방 제도'가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평화의 경로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논의 속에서 칸트는 1795년 저술한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철학적 구상』을 통해 도덕법칙과 인간 이성에 기초한 법의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그는 영구적인 평화 상태를 안착시키기 위해 법의 영역을 세 가지 층위로 구분하는 이른바 '3위일체법' 체계를 수립하였다.

법적 구분

명칭 및 법적 성격

영구평화론에서의 지향점 및 현대적 의의

시민법 

(ius civitatis)

한 인민 집단 내부에서의 인간 관계를 규제하는 국내법 6

대의제와 권력 분립을 핵심으로 하는 공화 정체의 확립 3

국제법

(ius gentium)

주권을 보유한 국가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법 4

일시적인 정전을 넘어서는 자발적 '평화연맹' 체제의 구축 3

세계시민법

(ius cosmopoliticum)

개인 and 국가 모두를 직접 규제하는 보편적 법률 6

지구촌 다문화 사회의 공존을 도모하는 보편적 우호와 인도주의 3

이 삼차원적 법치 구조는 국가를 도덕적 인격의 주체로 인식하고, 개별 국가의 경계를 넘어 전 지구적 차원의 평화와 번영을 지향하는 현대 세계시민주의 담론의 핵심 골격을 형성하였다.
 

2. 칸트의 영구평화 기획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국가들이 미래의 전쟁을 예방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실천해야 할 실무적 지침인 '6개 예비 조항(Preliminary Articles)'과, 평화 상태를 영구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헌정적 뼈대인 '3개 확정 조항(Definitive Articles)'의 정밀한 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비 조항은 장차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요인들을 사전 차단하고 국가 간 신뢰의 토대를 구축하기 위한 과도기적 규범들이다.

제1조 (평화조약의 진정성): 장차 전쟁의 화근이 될 수 있는 가조항들을 유보한 채 맺은 평화 조약은 무효이다. 이는 30년 전쟁을 종식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등 역사적 조약들이 지녔던 구조적 한계를 겨냥한 것이다.

제2조 (주권의 양도 불가능성): 독립된 주권국가는 크기와 관계없이 상속, 교환, 매매, 증여 등의 수단으로 타국의 소유로 전락할 수 없다.

제3조 (상비군 폐지): 상비군은 이웃 국가들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되어 군비 경쟁을 유발하므로 조만간 완전히 폐지되어야 한다.

제4조 (국채 발행의 금지): 국가 간 대외 분쟁이나 전쟁 비용 조달을 목적으로 국채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

제5조 (내정불간섭): 어떠한 국가도 타국의 체제와 통치 영역에 폭력적으로 간섭해서는 안 된다.

제6조 (비열한 적대 행위의 금지): 전쟁 중이라도 상호 신뢰를 영구히 파괴하는 비도덕적 적대 행위(암살자·독살자 고용, 항복 조약 파기, 반역 선동 등)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예비 조항을 통해 신뢰가 형성되면, 인류는 영구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 조건인 확정 조항을 전면 제도화하기 시작한다.

제1확정조항은 모든 국가의 정치 체제가 '시민 공화정체'여야 함을 규정한다. 칸트가 공화정을 강조한 이유는 국가 내부에서 입법권과 행정권이 분리되고 법의 지배가 확립될 때,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지는 시민들이 전쟁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신중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공화정 국가들 간에는 민주주의 제도의 제약과 가치 공유로 인해 상호 무력 충돌을 기피한다는 현대 '민주평화론'의 핵심 논거가 되었다.

제2확정조항은 국제법이 자유로운 주권국가들의 느슨한 결사인 '평화연방(foedus pacificum)'에 기초해야 함을 명시한다.

마지막 제3확정조항은 세계시민법이 보편적 우호의 조건에 한정되어야 한다고 천명하는데, 이는 낯선 영토를 방문하는 개인이 적대적으로 대우받지 않을 최소한의 인권적 방문 보장권을 명시함으로써 국가의 울타리를 넘는 세계시민사회의 물적 교류와 통합을 이끌었다.

이처럼 고도로 이상주의적으로 보이는 칸트의 구상이 현실 속에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동력은 인간의 도덕적 선의가 아닌, 역설적이게도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함이라는 '비사회적 사회성'에 있었다. 참혹한 대규모 전쟁을 직접 겪은 인류는 자멸에 대한 극한의 공포를 통해 스스로의 야만성을 자각하고, 이웃 국가들과 법적·제도적 관계를 맺으려는 사회적 본성을 자발적으로 회복한다.

그러나 이러한 칸트적 기획은 서구 식민주의 역사 속에서 가혹하게 변형되고 악용되는 사상적 한계를 노출하기도 했다. 서구 강대국들은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문명화 담론을 오리엔탈리즘적 도구와 결합하여, 식민지 민중을 온전한 문명인이자 주체적 인간으로 보지 않고 문명화의 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약탈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맞춤형 담론으로 소비하는 어두운 이면을 낳았다.
 

3. 평화 구현을 위한 역사적 제도화: 국제연맹과 국제연합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20세기에 들어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과 국제연합(UN)이라는 초국가적 국제기구의 탄생을 이끈 직접적인 사상적 모태가 되었다. 그러나 두 제도적 실험은 각기 다른 역사적 조건 속에서 규범적 지향점과 현실 정치 간의 거대한 타협 및 한계를 드러냈다.

국제연맹의 집단안보 실험과 붕괴 요인

제1차 세계대전의 재앙적 참상을 극복하기 위해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을 기반으로 창설된 국제연맹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집단안보 원칙을 전면 적용한 제도적 실체였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을 제재하지 못하는 등 무력함을 노출했고,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을 억제하지 못하며 공식 해체되었다.

국제연맹의 몰락 원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된다.

첫째, 모든 국가가 공동의 선을 위해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양보하고 단일 대오로 행동할 것이라는 이상주의적 가정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둘째, 질서 구축을 주도한 미국이 자국 의회의 비준 거부로 처음부터 배제되었으며, 혁명 직후의 공산주의 소련 역시 타국 정부의 정당성 불인정 등으로 인해 배제되었다. 셋째, 군사적 침략을 일삼은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이 연맹 규범을 위반하고 탈퇴를 강행했을 때 이를 제어할 수 있는 제도적 강제 장치나 회원국들의 참전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연맹의 수호 의무는 대제국을 소유한 영국과 프랑스에만 전가되었으나, 양국은 폴란드 침공 전까지 파시스트 세력의 도발을 묵인함으로써 집단안보 제도의 종말을 고했다.

국제연합의 세력균형 통합과 평화유지 기능의 진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출범한 국제연합(UN)은 국제연맹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현실주의적 세력균형과 자유주의적 다자규범을 융합하는 현실적 절충을 단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제도가 안전보장이사회(UNSC) 상임이사국 5개국(P5)에게 부여한 절대적 '거부권(Veto)'이다.10 거부권은 강대국들의 막강한 권력을 국제 제도 내에 제도적으로 통합하여 그들의 체제 이탈을 방지하고, 초강대국들의 대결이 전면전으로 유발되는 상황을 방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정밀한 하드파워 조율 하에, UN 체제는 정체되지 않고 냉전기와 포스트 냉전기의 국제 안보 환경 변화에 부응하여 평화유지활동(PKO) 등을 통해 다차원적으로 발전하였다.

구분

제1세대 평화유지활동 (정적 평화관리)

제2세대 평화유지활동 (다차원적 평화구축)

태동 시기

냉전기 (1948년~1980년대 후반)

냉전 해체기 이후 (1990년대~현재)

주요 임무

휴전 감시, 완충지대 관리, 분쟁 당사자 격리

행정 마비 복구, 선거 관리, 치안·사법 재건, 인권 감시

원칙의 적용

분쟁국의 합의, 엄격한 중립, 경무장 및 자위용 무력 사용 한정 

인도적 개입 승인, 부분적 평화 강제력 동원

구성 주체

군 옵저버 및 정규 군사 부대 중심

행정가, 경찰, 인권·선거 감시단 등 민관 융합

대표적 사례

UNTSO(1948), 제1차 유엔긴급군(UNEF, 1956) 

캄보디아 미션(대표적 성공), 보스니아 미션(한계 노출)

UN 헌장에 명시된 궁극적 수단인 '헌장 제7장에 의거한 군사적 집단 안보 조치'가 안보리 승인을 통해 실제로 실행된 역사는 1950년 한국전쟁과 1991년 걸프전 단 두 차례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UN 자체의 정규 상설 군사력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고 자발적 다국적군이 참여하는 방식을 빌려 간신히 수행되었으며, 이는 집단안보 원칙의 실제 이행이 현실 국제정치에서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명징하게 증명한다.

안보리 거부권의 구조적 마비와 '물리적 힘'에 의한 우회 경로

유엔 체제는 주권 평등을 공표하고 있으나, 그 핵심 설계는 강대국의 기득권을 헌법적으로 옹호하는 비대칭적 권력 분점에 의존한다. 이러한 제도적 한계로 인해 안전보장이사회는 창설 이후 강대국 간의 대결과 거부권(Veto) 오남용으로 인해 상습적인 기능 마비를 겪어 왔다. 특히 거부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강대국의 참여를 견인할 수 없다는 현실적 타협의 결과물은 결국 강대국이 국제 규범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자국의 이익에 따라 규범을 무력화하는 '강대국 예외주의'의 산실이 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안보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미국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판결이 이어지자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임명을 거부해 다자 분쟁 해결 메커니즘을 마비시킨 경제적 사례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안보리 거부권으로 다자 규범의 조율 기능이 완전히 정체될 때마다, 국제사회와 패권국들은 유엔의 사법적·제도적 한계를 보완하거나 우회하기 위해 실제적인 군사적 '물리적 힘(Force)'을 동원하는 대안 경로들을 구축해 왔다.

제도적 우회: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 (유엔 총회 결의 377A):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소련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안보리가 마비되자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진영은 총회 결의를 통해 우회로를 마련했다. 이 결의는 안보리가 상임이사국의 불일치로 평화 수호의 책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 총회가 즉시 임시회의를 소집해 회원국들에게 "무력 사용을 포함한 집단적 군사 조치"를 권고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 이는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거부권의 교착을 뚫고 실제적인 연합군의 군사적 '힘'을 한반도 전장에 동원할 수 있게 한 대표적인 제도적 보완재였다.

제도 외적 우회 1: 나토(NATO)의 유고슬라비아 공습 (1999년): 코소보 사태 당시 세르비아 정부의 인도주의적 범죄를 막기 위한 무력 개입안은 러시아와 중국의 비토로 인해 안보리 승인을 얻을 수 없는 구도였다. 이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안보리에 결의안을 상정해 부결되는 절차를 우회하고, 자신들의 독자적 동맹 군사력(하드파워)을 동원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직접 공습했다. 이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 논란을 낳았으나, 다자적 규범 질서가 대규모 참상을 해결하지 못할 때 군사적 강제력이라는 실력 행사를 정당화한 선례가 되었다.

제도 외적 우회 2: 이라크 전쟁과 '의지의 연합' (2003년): 미국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침공을 위한 안보리 무력 승인안 확보가 프랑스와 러시아 등의 거부 장벽에 가로막히자, 유엔 다자주의의 의결 틀을 아예 무시하는 전략적 행동을 개시했다. 미국은 자발적으로 참전 의지를 표명한 국가들을 결집한 '의지의 연합(Coalition of the Willing)'이라는 새로운 연합 군사 행동 체계를 구성하여 무력 침공을 강행했다. 이는 규범과 제도가 자국의 전략적 이익에 배치될 때 강대국이 강력한 하드파워를 무기로 삼아 국제 규범을 무시하고 힘을 투사할 수 있음을 입증한 중대한 일탈 사례였다.

국제 관계 이론가들은 집단안보가 지닌 실효성 한계와 취약성의 원인을 네 가지 구조적 취약성으로 설명한다.15

첫째, 집단안보는 단일 세력의 독점을 막기 위해 상당 수준의 권력 분산(dispersion of power)을 원초적으로 요구한다. 둘째, 위협의 성격을 평가할 때 개별 국가마다 자국의 국익에 따른 위협 평가의 편차(divergence in threat assessment)가 심대하여 공동 행동의 합의 도출이 극히 어렵다. 셋째, 타국이 지출하는 안보 비용에 무단 무임승차(free-rider)하려는 유인이 항상 존재하여 연대 약속이 쉽게 와해된다. 넷째, 집단안보는 역설적이게도 규정하기 쉬운 외부 공공의 명확한 위협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내부 결속력과 제도의 생존력 자체를 유지하기 힘든 내재적 모순을 지닌다.
 

4. 규칙 기반 평화와 힘에 기반한 평화의 상호작용 및 모순

포스트 냉전기부터 통용된 '규칙 기반 국제질서(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는 순수한 규범주의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닌, '규범에 기반한 제도'와 '힘에 기반한 패권' 간의 유기적이면서도 모순적인 상호작용 위에 축적된 정치적 구조물이다.

이 질서의 최상단에는 UN 체제를 축으로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과 무력 사용 금지를 천명하는 규범 기반 평화가 자리하고 있으며, 경제 영역에서는 WTO와 IMF 등 다자 협력체들이 자유 무역을 뒷받침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규범과 제도들이 정상 작동할 수 있었던 심장부에는 미국이 2차 대전 승리 이후 구축한 NATO, 미일동맹, 한미동맹 등 글로벌 동맹망을 통해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단 양 끝에서 구소련과 중국을 차단하고 억지한 강력한 '힘에 기반한 평화'가 지탱하고 있었다.

이처럼 규범과 힘이 결합된 상호 삼투적 구조는 냉전 이후 급격한 세계화(Globalization)와 상호 의존성을 심화시키며 국가 주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과거 베스트팔렌식 주권이 서로 부딪히며 튕겨 나가는 고립된 '당구공(billiard balls)' 형태였다면, 고도로 연결된 현대 세계시민사회 속의 주권들은 서로 스며들고 삼투(permeate)하는 개방적 주권 구조로 변모하였다.6 기술적 통신 혁명과 지구적 시장 금융의 발달은 미시적 영역까지 전 세계 국가들의 경계를 무너뜨려 개별 주권을 다층적 초국가 세력들과 긴밀히 연계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이중적 평화 구조는 세력 전이와 자국 우선주의가 발흥할 때 극심한 불안정성과 취약성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미국의 패권적 하드파워 우위가 정체되는 가운데 미·중 양국은 하드파워 경쟁을 넘어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주도권 경쟁, 사이버 안보, 국제사회 소프트파워 규범 수립권 등을 둘러싸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제로섬적 대치 상태에 진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 등의 미국 우선주의 압박이나 중상주의 정책은 규범 동맹의 실체를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일례로 미국이 자국 우선의 전면적인 관세 동원을 개시했을 때, 유럽, 일본, 한국 등의 민주주의 규범 우방국들은 연대하여 미국에 대항하는 다자적 대안 규범 전선을 구축하는 대신 개별 협상을 통해 미국의 요구를 조건부 수용하는 각자도생의 전략을 일제히 취하였다. 이는 규범적 지지와 제도적 연대라는 수사가 강력한 힘의 강제력과 자국 이익의 중력 앞에서는 쉽게 파열될 수 있는 취약한 토대 위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5. 다자주의의 다차원적 위기

현재 규칙 기반 세계질서는 서방의 규범적 독점에 대항하는 수정주의 국가들의 공세와 다자주의 기구의 의사결정 마비, 그리고 파편화된 소다자 연대로의 회귀라는 복합적인 구조적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지정학적 양극화와 안보리 무력화에 대한 저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주권 침공과 중국의 대만해협 및 남중국해에서의 일방적 현상 타파 시도는 무력 사용의 예외적 허용 요건을 엄격히 통제해 온 현대 국제법과 유엔 헌장 체제에 가해진 치명적인 균열이다. 특히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자행한 무력 침공은 안보리의 제재 결의 자체를 상호 거부권 행사를 통해 영구 차단하는 등 '식물 안보리'의 민낯을 전 세계에 드러냈다.

이러한 규범 마비 현상에 항거하여 국제사회는 다수결 원칙이 지배하는 유엔 총회를 우회로로 삼아 제도적 견제를 시도하고 있다. 리히텐슈타인이 주도하고 다수의 중소국이 지지하여 통과시킨 유엔 총회 결의안 76/262(일명 '거부권 이니셔티브')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거부권을 행사한 지 10일 이내에 총회의 공식 토론을 강제적으로 소집하여 거부권 행사국이 전 세계 회원국 앞에서 그 이유와 정당성을 직접 설명하도록 의무화하였다.

이는 소수 강대국의 일방적 거부권 사용에 도덕적이고 절차적인 책임을 추궁하는 중요한 규범적 제동 장치이나, 여전히 법적 구속력과 무력 제재권이 수반되지 않아 현실 안보의 침략 행동을 차단하기에는 물리적 효력의 공백이 존재한다.

소다자주의(Minilateralism)의 다원적 확산 양상

포괄적 다자 협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뜻을 같이하는 소수 국가들 간의 신속하고 기동력 있는 의제 해결 기구인 '소다자주의'가 보편적 다자주의의 공백을 메우는 대안적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현재 전개되는 인태 지역 중심의 소다자 협의체들은 성격과 추구하는 질서에 따라 세 가지 범주로 정밀하게 세분화된다.

첫째, 미국 주도의 기존 규칙 기반 질서(RBIO) 수호형 소다자주의: 쿼드(Quad, 미·일·인·호 장관급 협의체로 해양 안보와 항행의 자유 준수)와 오커스(AUKUS, Pillar 1의 핵추진 잠수함 기술 이전 및 Pillar 2의 첨단 군사 과학기술 공동 개발을 추구하는 군사동맹망) 등이 핵심적이다.

둘째, 미국 주도 질서에 대항하는 전략적 소다자주의: 중국과 러시아가 결성을 주도한 상하이협력기구(SCO)와 브릭스(BRICS+)가 대표적이다. 특히 2001년 출범한 SCO는 최근 벨라루스 가입으로 총 10개 회원국으로 확장되었으며, 'SCO 개발 전략 2035'를 채택하여 중국의 일대일로(BRI) 구상과 밀착 연계된 유라시아 대안적 거버넌스를 가속하고 있다.25 브릭스 또한 글로벌 사우스 신흥국들을 흡수하며 서방 중심 독점 체제를 다극적 대항 체제로 전환하고자 공세를 펼치고 있다.

셋째, 국경을 넘는 특정 비전통 의제 및 문제 해결 중심 소다자주의: 팬데믹 대비 보건, 재난 예방, 녹색 에너지 기술 확보 등 이념적 간극을 우회하는 실용주의적 기능성 연합체들이다.

이러한 소다자 네트워크의 팽창은 단기적인 협력 속도와 집행력 측면에서는 대단히 효율적이다. 그러나 배타적인 진영 블록으로 파열을 심화시켜 국제 사회에 통일성 있게 수용되어야 할 보편적 국제법적 규범들의 적용을 저해하고 파편화하는 부작용을 유발하며, 강대국 연대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을 고립시켜 다자질서 내부의 균열을 확대하는 가속 장치로 기능하기도 한다.
 

6. 전략적 시사점

한국에 있어 역사적으로 작동해 온 자유주의 국제질서와 개방적 다자체제는 오늘날의 경제 번영과 민주화를 추동한 근본적인 제도적 자양분이었다. 따라서 다자주의의 약화와 규범 질서의 동요는 한국 외교안보의 구조적 안정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위험 요인이다. 한국은 힘의 정치로의 전면 회귀를 지연시키는 규범적 옹호자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철저한 국익 기반의 다각적 소다자 생존 포트폴리오를 설계해야 한다.

평화유지(PKO) 외교 자산의 레버리지 극대화

한국은 1993년 소말리아 파병을 시작으로 서부사하라(1994), 앙골라(1995), 동티모르(1999), 레바논(2007), 남수단(2013) 등에 지속적으로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며 UN 체제 내 책임 있는 중견국으로서의 평화 브랜드 입지를 다져왔다. 특히 한국은 신속하고 효율적인 다자 평화 기여를 뒷받침하기 위해 법적 제도적 토대를 마련해 둔 상태다.

'유엔 평화유지활동 참여에 관한 법률' 제정 및 의의: 2009년 12월 29일 국회 본회의 통과를 거쳐 2010년 4월 발효된 해당 법률은 정부가 국회의 사전 동의를 바탕으로 총 1,000명 규모 이내에서 파병지, 규모, 기간 등을 UN과 잠정 협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13 이를 통해 과거 안보 정세 변화에 조기 대응하지 못하고 평균 6~7개월씩 소요되던 파병 결정 및 실행 기간을 3~4개월 이내로 대폭 단축하는 신속 대응력을 확보하였다.

한국은 이러한 법치적 기반과 신속 대응 역량을 더욱 고도화하여 기상이변, 대량 이주민 발생, 내전 격화 지역 등 인권과 생명이 위협받는 최전선에 투입함으로써 글로벌 다자 안보 네트워크 내에서 대체 불가능한 핵심 공여국으로서의 발언권을 축적해야 한다.

다원적 소다자 네트워크 가입 및 의제 주도형 연대

한국 외교는 단일 진영에 완전히 편입되는 과도한 일체화 외교를 지양하고, 다층화된 소다자 네트워크를 정교하게 엮어 국익의 그물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한·미·일 협력이나 NATO 글로벌 파트너 등 안보의 기본 기둥을 확고히 다지는 한편, 독자적으로 의제를 선도할 수 있는 공간에 주도적으로 판을 설계하는 외교가 수반되어야 한다.

대표적 방안으로 아태 지역 내 경제적, 이념적 동질성을 공유하면서도 중견국의 연대 범위를 구축할 수 있는 'JACKs' 연대체(일본, 호주, 캐나다, 한국) 결성을 추진할 가치가 충분하다. 태평양을 접하는 우방이자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연대를 공고히 다짐으로써 미·중 패권 충돌의 파고로부터 국가적 고립을 막고 다자적 헤징 능력을 축적해야 한다.

또한 한국이 탁월한 역량을 축적한 해양 안보, 첨단 반도체·배터리 공급망, 과학기술 안보, 그리고 한·호주 에너지 연대와 같은 에너지 연합 체계 구축 등 기능적 우위 분야에서 한국이 설계자(Designer)로 등판하여 소다자 협의체를 신설하는 능동성이 긴요하다.

보편적 신안보 아젠다 제시를 통한 다자질서 중심축 역할

코로나 이후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평화의 성격은 군사안보에만 머물지 않고 기후변화 대응, 보건 방역망 구축, 디지털 가상공간 보안 등 '기술 기반의 해결력'을 요구하는 비전통 신안보 분야로 축이 전이되고 있다. 한국은 이러한 틈새 영역에서 글로벌 선도자로서 아젠다를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제시함으로써 다자주의 국제 공공재 수립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다양한 소다자 기구들이 양산하는 난개발과 규범 파편화의 비효율, 이른바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를 축소하기 위해, 다양한 소다자 협력들을 종국에는 광범위한 다자 연계 구조로 수렴시키는 시스템 연계자로서의 외교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글로벌 사우스가 서방 주도의 특정 블록 연대 구도에 피로감을 느끼며 이탈하는 현 시점에, 한국은 신뢰할 수 있는 개발-평화 넥서스 중재 국가로서 개도국과 선진국 간의 교량 역할을 성실히 이행할 때, 쇠락해 가는 규칙 기반 국제질서 안에서 국가적 위상을 획기적으로 향상하며 스스로의 안위와 영구평화의 길을 견고히 이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성우회 안보전략연구원장 김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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