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자료실

자유지 4월호 권두언]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국가안보

2018.05.03 Views 1474 관리자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과 국가안보

 

임 원 빈(해군사관학교 명예교수, 전 해사 교수부장)

 

올 해는 무술년으로 정유재란 종료 7주갑이 되는 해 이니 이충무공께서 순국하신지도 어연 420년이 되었다. 1592413(음력)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수도 한성을 향하여 진군하였다. 425, 순변사 이일이 경북 상주에서 진을 치고 맞서 보았지만 중과부적으로 패하였으며 428, 삼도순변사에 임명된 신립은 8,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충주 탄금대 앞 벌판에서 배수진을 치고 일본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8,700여 명과 맞붙었으나 완패하고 말았다. 결국 일본 침략군은 53, 임금 선조가 버리고 떠난 한성에 무혈입성(無血入城)하였으니 조선은 전쟁이 시작된 지 20일이 채 안되어 도성(都城)을 함락당한 것이다. 조선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는 나름대로 준비된 수군과 위대한 리더 이순신이 있었다. 침략 지점에 위치한 경상좌수영은 수사 박홍이 수영(水營)을 이탈하는 바람에 초기부터 궤멸되었고, 경상우수영 또한 대부분의 지휘관들이 도주하여 수 척의 판옥선밖에는 남지 않았지만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과 이억기가 지휘하는 전라우수영 수군은 온전히 건재하였다. 그리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의 통합 함대는 임진년(1592) 첫 해, 네 차례 출동을 감행하여 벌인 16회의 크고 작은 해전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남해 바다의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임진년 마지막 출동인 제4차 출동에서는 일본의 조선 침략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부산포를 전격 공격하여 일본 함선 100여 척을 격파함으로써 평양과 함경도까지 진출하였던 일본의 지상군들이 남해 연안으로 철수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정유재란 시기에 벌어진 절체절명의 명량해전에서는 13척 대 133척이라는 절대 열세를 극복하고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함으로써 경상도를 넘어 호남과 충청도까지를 장악하려던 일본의 조선 침략 전략을 또 다시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病死)로 말미암아 철군하려던 일본 수군과 벌인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적의 조총의 탄환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 날이 바로 무술년(1598) 1119일이었으니, 향년 54세였다.

이순신에게 있어서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정의의 전쟁이었다. 수 천 년 동안 우리나라의 은혜를 입어 온 일본이 아무런 이유 없이 침략을 하여 백성을 도륙하고 임금이 있는 도성(都城)을 침탈하는 만행을 보면서 그는 일본군들을 함께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원수이른바 불구대천지원수(不俱戴天之怨讐)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런 불의한 침략자에 대해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철저히 응징하여 정의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마지막 노량해전은 단 한 척의 배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겠다[片帆不返]’라고 한 평소의 다짐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이순신의 역사의식, 가치의식이 반영된 위대한 해전이다.

또 한편 이순신은 전쟁 기간 내내 조선의 수군 장수로서 일본군의 침략을 바다에서 막아내지 못한 것에 대하여 무한한 책임감과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순신은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도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실제로 해전이 벌어지면 내 목숨은 하늘에 달렸는데 어찌 너희들만 수고하도록 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부하 장병들과 함께 선두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임진년(1592) 2차 출동 중에 있었던 사천해전에서는 뱃전에서 사부(射夫)들과 함께 나란히 서서 활을 쏘다가 일본군의 조총 탄환에 왼쪽 어깨를 맞았다.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는 사천해전에서 전사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13척 대 133척의 절대 열세 상황에서 치른 명량해전 초기는 그야말로 위기 상황이었다. 하루 전날, 부하 장수들은 모아 놓고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자고 약속하였지만 130여 척의 일본 함선이 일제히 공격해오자 부하 장수들은 겁에 질려 모두들 회피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심지어 조선 수군 서열 2위인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는 수 백미터 뒤 처져 있었다. 위기를 직감한 통제사 이순신은 홀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그리고 각종 총통과 화살을 빗발치듯 쏘아대며 그들의 진격을 온 몸으로 가로 막았다. 단기필마(單騎匹馬) 형국의 이순신의 용전분투는 명량해전 초기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지만 자칫했으면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포위되어 전사할 수도 있었다. 마지막 노량해전이 있던 전날 밤 12시 이순신은 배 위로 올라가,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만 있다면 내 한 몸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此讐若除, 死卽無憾]”라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리고는 노량으로 진입하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여 승기를 잡아놓은 새벽 녘, 남해 관음포 앞 바다에서 적의 조총에 맞아 전사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바다에서 막아내지 못하여 수많은 조선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어느 전투에서나 부하 장병들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던 이순신, 단 한 척의 배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함으로써 7년 동안 저지른 침략자 일본군의 범죄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자 했던 이순신, 우리가 면면히 계승하고 본 받아야 할 호국정신의 영원한 사표(師表)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어떻게 해서 모든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을까? 그리고 결과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전략을 무력화시키고 나라를 지킬 수 있었을까? 임진왜란 초기 해전의 상황을 분석해 보면 우리의 역사 상식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눈에 띄인다. 이순신의 승리가 너무나 일방적이고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임진년 제1차 출동에서는 3회의 해전에서 총 48척을 조우하여 44척을 격파하였고, 2차 출동에서는 4회의 해전에서 72척을 만나 72척 모두를 격파하였다. 또한 한산해전이 포함된 제3차 출동에서는 조우한 115척 가운데 79척을 격파 및 나포하였다. 부산포를 공격하였던 제4차 출동에서는 총 130여 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순신이 중심이 된 조선 수군은 임진년(1592) 첫 해에만 총 330여 척의 일본 함선을 격파 및 나포한 것이다. 더 놀랄만한 사실은 이 과정에서 조선의 함선은 단 한 척도 격파되거나 나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해전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는 아무도 전쟁 준비를 안했다는 역사적 상식과 달리 수군의 경우는 고려 말 이래 200여 년 동안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여 착실한 전쟁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언제나 함대를 통합 운용하여 우세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운 탁월한 리더 이순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군의 경우는 첨단 화약무기였던 조총에 조선군이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수군의 경우는 정 반대였다. 조선 수군은 천자총통, 지자총통으로 대표되는 대형화약무기를 함포 개념으로 운영하는 첨단 수군으로 발전해 있었던 데 반해 일본 수군은 조총이나 칼을 중심으로 한 재래식 수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조선 수군은 일본의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있었지만 일본 수군은 조선의 함선을 격파할 수 있는 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나아가 이순신은 언제나 함대를 통합 운영하여 전투력을 극대화하였는데 반해 일본의 수군 함대는 분산되어 노략질을 일삼고 있다가 부대별로 각개 격파되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함선 숫자에서는 일본이 조선보다 10배 이상 많았지만 구체적인 전투국면에서는 오히려 조선 수군의 함선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 조선 수군은 단위 함정 당 질적 전투력에서 일본 수군을 압도했을 뿐만 아니라 리더 이순신의 탁월한 병법 역량에 의해 척 수면에서도 우세한 상황이 조성되었으니 그 결과는 언제나 압도적 승리, 완전한 승리였다.

준비 없는 승리가 없는 것처럼 준비 없는 튼튼한 안보도 없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에서의 수군의 경쟁력은 고려 말 이래 200여 년 동안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병력, 무기, 함선을 착실히 준비해 온 자랑스런 수군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화약을 만든 최무선 장군, 판옥선을 건조되는 데 기여했던 서후, 송흠, 정걸 장군 같은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충무공 이순신 같은 유능하고, 정의로운 인재가 해전 전술을 혁신하고 거북선을 건조하는 등의 철저한 전쟁준비를 했기 때문이다. 열강들에 둘러싸여 있는 대한민국이 굳건한 안보를 위해 유념하고 또 유념해야 하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원리원칙자요,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던 정의로운 인물로 알려진 이순신은 어떻게 당파 싸움과 음모가 난무했다고 알려진 조선 조정에서 도태되지 않고 출세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당시의 조선 조정의 가치지수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공무원, 군 사회보다도 훨씬 높았다.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 조정에는 나라와 백성을 진정 사랑하는 서애 류성룡, 오리 정승 이원익, 약포 정탁, 백사 이항복, 한음 이덕형 같은 실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품격있는 관리들이 즐비했으며, 이들은 대부분 이순신의 열렬한 지지자요, 후원자였다. 우리의 영웅이요, 성웅인 탁월한 리더 이순신도 존경해야 하지만 아울러 이순신처럼 실력과 도덕성을 겸비한 인재가 도태되지 않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보호해 준 당시 조선 조정의 건강한 조직 환경, 사회 환경에도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굳건한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처럼 준비하고 또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이순신 같은 실력 있고 정의로운 인재가 등용될 수 있는 건강한 조직 환경, 사회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도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이다.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경제가 지향하는 것은 성장 중심이지만 성장의 열매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하고 배분할 수 있는 건강한 사회 환경, 조직 환경을 만드는 일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 모든 국민들이 피땀 흘려 일궈낸 성장의 열매를 소수의 기득권들이 독점하거나 권력자와 자본가가 유착관계를 형성하여 공유하려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병리적 사회 환경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위협하는 최대의 적이다. 공정하고, 투명하고, 정의롭지 않으면 자유민주주의도, 국가안보도 설 곳이 없다

댓글 0개

비밀번호 확인
작성 시 설정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