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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도 역사를 알아야 제 역할을 한다

2014.06.04 Views 2332 관리자

`무기도 역사를 알아야 제역할을 한다`

 

문 갑식

조선일보 기자

 

북한이 만든 무인공격기가 서해 백령도, 경기도 파주에 이어 강원도 청옥산에서 발견됐다. 이런 뉴스를 접할 때마다 화가 치미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왜 경제력에서 월등히 낮은 북한에 안보에 관해서는 불안감을 가져야하는가?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어떤 무기가 대한민국에게 위협이 된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우린 대응무기를 사들인다지만 그후론 잊는다. 뉴스대로 보강했다면 우리는 이미 세계적 군사대국이 됐을 것이다.

다른 이유를 들자면 무기에도 영혼역사가 있다는 걸 우리가 잊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그런 측면에서 지난달 4일 경남 진해군항에서 취역한 김창학함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함정은 우리 해군이 발주한 14번째 유도탄 고속함(PKG-727)이다. 5월까지 전력화 훈련을 한 후 실전 배치된다고 한다.

이날 취역식에는 주요 지휘관과 장병, 방위사업청 등 협력기관, 한진중공업 관계자 등 100여명이 참석했는데 눈길을 끈 것은 대한해협해전 당시 백두산함(P-701)에 근무한 인물들이다.

김창학과 함께 북한의 무장 수송선박을 격침시켰던 한국해양소년단연맹 최영섭 고문(전 백두산함 갑판사관겸 포술장)을 비롯한 백두산함 승조원, 그리고 고 김창학 하사의 유가족 등이 참석해 자리를 빛낸 것이다.

이날 취역한 김창학함은 450톤급으로 전장 63미터, 전폭 9미터, 최대 속력 40노트이며 대함유도탄과 함포, 대함전 및 대공전, 전자전 등을 수행할 수 있는 전천후 군함이다. 또 선체에 스텔스 기법도 적용했다.

김창학함으로 사후 60년만에 부활한 김창학 하사는 6.25전쟁 당시 북한함정을 격침시킨 대한해협 해전에서 백두산함 조타사로 참전했다. 그는 교전 중 적탄에 맞아 내장이 파열됐지만 끝까지 조타기를 놓지 않았다.

과연 이것이 기록의 전부일까? 지금부터 김창학의 삶을 추적해보기로 한다. 김창학 하사의 주무대는 6·25때 벌어진 대한해협전투였다. 그것은 우리 군 최초의 승전기록이다. 이 전투를 기자는 이렇게 기록했었다.

 

윤숙이,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돼요. 뉴욕의 존 스태거씨에게 꼭 전해야 합네다.” 문서를 건네주는 노()대통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걸 받아든 이는 시인 모윤숙(毛允淑)이었다. 1949년 어느날 경무대(景武臺)에서 있었던 장면이다.

진해를 미군에게 맡길 테니 군사원조를 해달라!’ 이런 민감한 내용의 친서를 외교관 아닌 젊은 여성에게 맡긴 사연이 있었다. 한 달 전 같은 일을 공직자에게 시켰더니 일본 하코네(箱根)온천에서 기생 끼고 농탕치다 편지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60년 전 우리 수준은 그랬다. 인적자원은 이 지경이었고, 팔아먹을 천연자원도 없었다. 그래서 일제가 만든 군항(軍港)에 미군을 끌어들여 안보도 다지고 달러를 받아 맨주먹뿐인 군대까지 무장시키자는 일석이조의 꾀를 낸 것이다.

트루먼이 무시하는데도 자존심 센 이승만이 끝내 매달린 이유가 있었다. 독립운동 시절 진주만기지에서 본 미국 함대와 해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에겐 함정이 36척 있었지만, 미국제 소해정(掃海艇) 몇 척 빼면 어선이나 다를 바 없었다.

번듯한 전함(戰艦)은 이승만의 염원이자 해군의 바람이었다. 그 비원(悲願)으로 19496함정건조기금갹출위원회가 발족했다. 해군이 봉급에서 성금을 떼어내자 아내들은 천막에서 작업복을 지어 팔았다. 이렇게 석 달간 15000달러를 모았다. 딱 중고 전함 한 척 값이었다.

전함구매단이 미국에 가서 산 게 450톤짜리 구잠함(驅潛艦)이었다. 퇴역해 벌겋게 녹슨 배를 되살리려 구매단은 수리공·페인트공이 됐고 그해 1226일 오전 10시 마침내 명명식이 열렸다.

백두산함은 가는 곳마다 동포를 울렸다. 마스트에 태극기가 처음 걸릴 때는 군인이, ·레이더를 구하러 간 하와이에선 사탕수수밭 노동자가, 포탄 사러 간 괌에선 징용갔다 미처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들이 울었다. 처음엔 배가 너무 초라해, 나중엔 그래도 조국의 첫 전함이라는 뿌듯함이 눈물샘을 건드렸다.

백두산함은 진해에 도착한 한 달 반 뒤 6·25전쟁이 터지자 진가를 발휘했다. 부산항으로 접근하던 소련제 수송선을 대한해협에 수장(水葬)시킨 것이다. 거기엔 북한특공대 60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남한항구 중 접안(接岸)시설은 부산에만 있었다. 백두산함이 없어서 부산이 함락됐다면 한국에 온 100만 병력과 물자는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낙동강에 기댄 국군은 뒤통수를 맞고 전멸하고 그와 함께 대한민국도 사라졌을 것이다.

해군과 군항은 이렇게 운명을 가른다. 문제는 우리 해군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상황은 그때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데 있다. 위에는 북한, 왼쪽엔 중국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한국 해군을 반나절 안에 궤멸시킬 수 있는 전력을 보유한 일본이 있다.

이 중 누구라도 제주 남방해로를 1주일만 틀어막아도 한국은 고사(枯死)한다. 원유·곡물·원자재가 그곳을 지나기 때문이다. 그런 요충이기에 군을 그렇게 싫어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조차 제주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지 않았다.

거기서 종북(從北)얼간이들이 날뛰고 겁쟁이 정권은 끌려 다녔다. 백두산함의 넋이 살아있다면 몇줌 안되는 김정일 추종세력에 앞서 그들을 겁내 국민의 생명줄조차 못 지키는 비겁한 정권을 향해 분노의 포신(砲身)을 돌렸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2003515일 전쟁기념관에서 김창학을 호국인물로 헌양했다. 흉상도 봉안했다. 그런데 이것을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이를 기억하는 이들은 놀랍게도 이 전투에 참여한 노병들이며, 그 광경을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최영섭, 그는 아직도 자기 직함을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포술-항해사라고 쓴다. 뒤에는 해군소위 최영섭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그는 3월 김창학함 취역식에서 오래전 세상을 뜬 전우에게 이런 헌사를 바쳤다.

김창학은 우리 곁에 생존해있다. 노병은 이 식전에서 민족의 역적 김일성의 6·25남침 바로 그날밤 대한해협에서, 특공대 600여명을 탑재하고 부산을 침략하려는 적함과의 전투중 적탄을 가슴에 맞고 장렬히 전사한 김창학의 분전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있습니다.’

노병은 11년전의 흉상봉안식을 되새긴다. ‘그 자리에 87세의 김창분여사, 80세의 둘째누님 김창수여사 그리고 이 자리에 계신 73세의 막내동생 김임순 여사가 참석하셨습니다.’ 11년이란 세월은 덧없이 흘렀다.

두 누나는 이승을 떠났고 막내동생은 이제 84세의 할머니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흐르는 시간이 어떻게 정확한 사실(史實)을 거스를 수있을까. 1929년 경기도 평택에서 태어난 김창학은 19486월 해군에 입대한다.

해군 제10기인 그가 해군에서 유일한 함정인 백두산함에 승조한 것은 19504, 6·25가 터지기 두달전이었다. 짧은 생을 단 한번의 전투에서 마치면서 그는 더운 피를 뿜으면서도 조타간을 꽉 틀어쥐었다고한다.

김창학은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적함은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적함은 격침됐다. 살아야돼! 정신차려라고 외쳤습니다. 그순간 김창학 전우는 환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하며 고개를 떨궜습니다. ‘대한민국-’.”

김창학이 목숨을 던져 지킨 부산항으로 71일부터 스미스대대 406명을 비롯해 UN군 연 병력 590만명이 들어왔다. 무기-탄약-장비는 5500만톤, 유류는 2200만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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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1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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