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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4월호 안보논단] 우리는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

2018.05.03 Views 1384 관리자

우리는 누구를 존경해야 하는가

김병렬(법학박사, 전국방대교수)

  리는 살다보면 가끔씩 누구를 존경하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또 여론조사기관에서 주기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을 조사해서 발표하기도 한다. 조사기관에 따라서 다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세종대왕 또는 이순신을 존경하다는 사람들이 1, 2위를 차지한다.

  존경이란 공경하고 따르겠다는 의미

존경이란 남의 훌륭한 행위나 인격 따위를 높여 공경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존경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세종대왕을 왜 존경하느냐고 물으면, 장영실을 발탁한 것처럼 반상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활용하는 리더십 때문이라거나, 출산한 노비에게 반드시 90일 이상 산후 휴가를 주도록 법을 제정하는 등 인권정신이 투철했기 때문이라거나, 아니면 한글을 창제해서 문맹을 없앴기 때문이라는 등의 뚜렷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순신 역시 마찬가지다. 2323승을 한 전략전술의 귀재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국가가 자신을 모함하여 죽이려고 했음에도 개의치 않고 기꺼이 조국을 위해 생명을 바쳤기 때문인지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

어느 나라든지 가장 국민적 존경을 받는 사람을 자기 나라의 화폐에 인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조금 예외인 것 같다. 천원 권에 이황, 오천원 권에 이이, 만원 권에 세종대왕, 오만원 권에 신사임당이 인쇄되어 있다. 이순신은 과거 오백원 권에 인쇄되었다가 지금은 사라졌다. 그런데 이들 지폐에 인쇄된 인물들이 모두 우리 국민의 존경을 받는 최고의 사람들인지, 존경을 받는다면 어떤 이유로 존경을 받는지 알기가 어렵다.

임진왜란 전에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의가 여러 번 있었다. 심지어 병조판서로 근무하던 이이(1537~1584)는 임진왜란 발발 9년 전인 선조 16(1583)10만 양병설을 건의했다. 하지만 건의뿐이었다. 10만 양병을 위해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로 있던 황형이 군포도 내지 않고 군역도 지지 않는 지방세력가의 자식들을 전쟁에 대비하여 강제로 징집하였다. 그러자 왜놈들의 손에 죽는 것이 차라리 황형의 손에 죽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면서 양반들이 들고 일어나 조정에서 황형의 파직까지 논의했을 정도다. 그렇다면 황형이 훌륭했던 것인가 이이가 훌륭했던 것인가? 예를 들어 현대의 국방부장관이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여 이지스함 20척을 구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했다고 가정했을 때 훗날 그 사실만을 가지고 그를 훌륭한 장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진왜란 발발 전에 군역자원의 총 수는 전국적으로 15만 명 정도였는데 실제 군역을 지고 있는 사람은 8천 명이 안되었다. 특히 양반 자제들이 유학공부를 이유로 군역을 면제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도 군역을 지워야 한다는 논의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매번 나라를 이끌고 갈 사람들을 군에서 썩게 해서는 안된다는 양반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오랜 논의 끝에 가까스로 과거시험 준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만이라도 군역을 지우도록 하자는 합의 하에, 명종 8(1553) 낙강자충군법(落講者充軍法)을 시행하게 되었다. 즉 예비고사를 치러서 불합격하는 사람은 설사 양반자제들이라고 하더라도 군역을 지우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사헌 이황(1501~ 1570)은 부랴부랴 고향 안동에서 향시를 준비하고 있던 아들 이준에게 관료의 자제라도 소속된 곳이 없으면 군역을 부과한다고 하니, 얼른 향교에라도 이름을 걸어두는 것이 좋겠다. 경서 1권과 사서 1권을 시험 본다고 하니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라. 그리고 여러 조카들에게도 이 사실을 알려라.”라고 편지를 보냈다.

    일본이 곧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철저히 대비를 해야 한다고 와글와글 떠들어 대면서도 너나 할 것 없이 자기 자식들이 군대에 가는 것은 원치 않았고, 성곽을 보수하기 위해 재산을 내어 놓는 것도 아까워했다. 그러니 말로는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댔지만 십만양병은 고사하고 무너진 성곽을 보수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병무부조리를 조사해서 처벌토록 해야 하는 대사헌이라는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군대에 보내지 않기 위해 편지를 보냈고, 병조판서라는 자 역시 입으로만 10만의 병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건의했지 자기 아들부터 솔선해서 군대에 보내겠다는 이야기는 끝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낙강자충군법(落講者充軍法)의 시행관(軍籍敬差官)으로 경상도에 파견되었던 정이주가 시험감독을 엄격하게 하여 수험생의 1/4을 떨어뜨리자, 떨어진 유생들이 정이주가 뇌물을 준 사람들만 합격시켰다고 집단으로 사헌부에 투서를 하여 정이주가 마침내 파직되기까지 했으며, 떨어진 유생들이 매번 다음 시험장소로 보따리를 싸가지고 이동하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군역면제고시 낭인만 양산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이황이나 이이나 유림에서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이지만 화폐에까지 인쇄해서 전국민의 존경을 받을 정도로 훌륭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이다.

  화폐에 인쇄해 존경을 받을 만한 인물은 많다

  1967년 중동에서 제3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대학 기숙사에서 이스라엘과 아랍 출신 학생들이 모두 사라진 현상이 일어났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스라엘 학생들은 참전을 하기 위해 모두 이스라엘로 자진 귀국했고, 아랍학생들은 본국에서 징집영장이 날아 올까봐 피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학생들보다도 훨씬 숭고한 학생들이 있었다. 중동전쟁이 일어나기 17년 전인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자,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참전을 했다. 이들은 병역의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조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너도나도 의용군으로 참전하려고 줄을 섰다. 일본 정부는 이들에게 출국은 자유지만 재입국은 한일 간에 국교가 없기 때문에 안된다라는 통고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살려야 한다며 일본에 있던 부모형제, 애인을 뒤로 하고 기꺼이 귀국했던 것이다. 642명이 참전해서 135명이 전사했고, 200여명이 부상했다. 생존자들은 일본으로의 재입국이 허가되지 않아, 일본에 있던 부모들이 밀항할 수 있는 돈을 보내온 일부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모형제, 애인들과 영원히 생이별을 한 뒤 잿더미가 된, 말도 통하지 않는(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했기 때문에 우리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다) 한국에 남아있을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조선시대의 석학인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주장한 인생관의 논리적 학설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이 어떻고 인심(人心)이나 칠정(七情)은 기()가 발동하여 나타난 것으로서 선악(善惡)이 다 있다는 이기호발(理氣互發)이 어떻고 하는 국민들의 생활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형이상학적 탁상공론으로 나라를 파탄 낸 고명한 유학자들보다 훨씬 숭고한 정신을 가졌지만 지폐에 인쇄는커녕 잘 알려지지도 않고 있다.

 

반대 없는 사람들만을 화폐인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

6.25 전쟁 때 이 나라에서도 학교에 다니던 많은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전쟁에 나간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니고 살 수도 있다는 일말의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재일학도의용군은 만에 하나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랑하는 부모형제, 애인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는 결심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제의 한국 병탄 음모에 분개한 안중근은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살작전이 성공을 해도 죽을 것이고 실패를 해도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병탄 음모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사살할 계획을 수립하고, 하얼빈 역에서 이를 수행했다.

이황, 이이, 신사임당, 세종대왕, 이순신, 재일학도의용군, 안중근 다 숭고하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누가 더 숭고하고 존경을 받아야 할 사람들인가?

변명하는 사람을 존경해서는 안된다 

일부 진보세력들은 신영복이라는 사람을 존경한다고 한다. 그는 통혁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전향서를 쓰고 20년 만에 출옥을 한 사람이다. 훗날 그는 비록 자기가 전향서를 쓰기는 했지만 동지들을 배신하지도 않았고, 자기의 사상을 바꾸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가 쓴 전향서는 출옥을 위한 한낱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사상범은 확신범이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자신이 선택한 사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 확신범이다. 아니 버리는 척을 해서도 안된다. 그래서 우리는 유관순 열사를 존경하는 것이다.

만약 유관순 열사가 감옥에서 나오기 위해 일제에 영합하는 전향서를 썼다면, 그가 아무리 나는 동지들을 배신한 적이 없다. 나의 독립운동 열망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고 변명을 해도 우리는 그를 결코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항상 안보적 위기에 처해 있는 나라의 지폐에는 국민적 존경 차원에서 유관순 열사나 안중근 의사, 재일학도의용군이 인쇄되어야 한다. 혹자는 그들을 인쇄하면 일본을 자극하기 때문에 안된다며 반대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일본 지폐에 이토오 히로부미가 인쇄되었을 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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