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부대’, 재일학도의용군의 호국충정을 기억하자!
문관현
연합뉴스 부장
소설 ‘러브 스토리’ 작가인 에릭 시걸(Erich Segal)이 남긴 또 다른 명작 ‘클래스(The Class)`는 1958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친구 5명이 걸어간 다양한 삶의 궤적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엘리트 코스를 거부하고 이스라엘군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한 유대인 제이슨 길버트 주니어가 선택한 길은 논픽션 이상의 감동을 전해준다. 제이슨의 경우 제3차 중동전쟁(6일전쟁)에 앞다퉈 참전한 유대인 유학생을 소재로 삼았는데 베스트셀러 작가의 손을 거치면서 의미가 더해졌다. 무엇보다 조국의 부름을 받았을 때 어떤 선택을 내려야 하는지 귀감을 삼을 수 있는 대목이라고 본다.
학창시절 유대인 젊은이들의 참전사를 배우면서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았다. 또 지구상 마지막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국내 대학생과 해외 유학생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라고 궁금증을 자아냈다. 안타깝게도 필자 본인을 포함해 가까운 친구들마저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먼 나라 이야기로 여겨진 유대인의 참전 스토리는 부러움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다.
필자는 국방대학교에서 한국전쟁을 주제로 학위논문을 작성하면서 재일동포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현해탄을 건너왔다는 사실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평북 창성 출신 고(故) 강영훈 총리가 2008년 발간한 자서전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 우연히 재일동포 참전사실을 처음 확인했고, 수소문 끝에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 존재를 찾아낸 것이다.
2008년 7월 초 여의도 중앙보훈회관 4층 사무실을 처음 찾았을 때 김병익 당시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장님(金炳翼·2017년 작고)은 반갑지 않은 얼굴로 맞았다. 김 회장님은 “642명이 재일동포 학생들이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해보겠다고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에 뛰어들었지만 이제 한국에 46명만 남아있다”고 푸념했다. 김 회장님은 이어 “이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우리를 이런 식으로 방치한다면 만에 하나 전쟁이 날 경우 누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김 회장님은 길게 한숨을 내쉰 뒤 서랍 속에서 빛바랜 사진과 증명서들을 꺼내들었다. 1950년 여름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뜨겁게 달아올랐던 세계 최초의 해외국민 참전사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 청년들의 6일전쟁보다 17년이나 앞서 병역의무도 없는 재일동포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총을 들고 전쟁터에 뛰어든 기막힌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소련제 T-34탱크를 앞세운 북한군이 불과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은 재일동포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하지만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이하 민단)은 전쟁 발발 이튿날 담화문을 발표하고 확대간부회의를 개최하는 등 발 빠른 대처를 보였다. 회의 결과 자원병 파견과 구호물자 및 위문품 발송 등을 골자로 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민단 중앙본부는 8월 5일 자원병지도본부를 설치하고 지원서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지원자 가운데 선발과정을 거쳐 18세부터 45세까지 총 642명이 최종 선발됐다. 일부 여성지원자들이 한국행을 고집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주일한국대표부(공사 김용주)는 당시 일본을 점령 중이던 미 극동군총사령부와 접촉을 갖고 이들의 한국행을 논의했다.
1950년 9월 7일 도쿄(東京) 스루가다이 호텔에서 환송식을 갖고 78명이 출정식에 참석했다. 이들은 미군 트럭에 몸을 싣고 사이타마 현 아사카(朝霞) 소재 미제1기병사단 미8군 보충훈련소에 입소했다. 첫날 신체검사를 받고 이튿날부터 미군식 구령과 거수경례법, 제식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군번과 계급 없는 이들은 속성교육을 받고 나흘 만에 요코하마(橫濱)항으로 이동해 수송선 피닉스 호에 승선했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던 미제7보병사단 병력에 합류한 것이다. 이들은 갑판 위에서 미군들로부터 M1소총과 카빈소총 분해조립법을 배웠고 무장을 갖췄다.
재일학도의용군 1진이 1950년 9월 16일 오후 인천 앞바다에 도착했고 다음날 상륙용 주정을 타고 인천 땅을 처음 밟았다. 이어 같은 달 24일 재일학도의용군 2진이 현재 인천 올림푸스 호텔 주변에 상륙한 뒤 각기 다른 미군부대에 배속됐다. 3진은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한 뒤 경기도 이천을 거쳐 동해안 이원과 원산 상륙작전에 가세했다.
큐슈(九州) 출신 145명으로 구성된 4진은 국군 9사단에 배속돼 백마고지전투와 금화전투에 참여했다. 다른 큐슈 출신 52명은 9월 18일 캠프 모리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카투사 고유 군번인 K-1138301~K-1138352를 부여받았다. 미3보병사단에 배속된 이들은 원산상륙작전에서 전공을 세웠고 북·중 경계지역인 풍산과 갑산, 혜산진 일대에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마지막 재일학도의용군은 경기도 부평 소재 미제3병참기지 사령부에 배속돼 부대 외곽경비와 순찰, 차량수리와 같은 허드렛일에 투입됐다. 이들의 전투에 투입되지 못한 불만이 누적되자 일본인 2세인 지미 고자와 중위는 재일학도의용군으로 구성된 단일부대 창설을 상부에 건의했다. 그 결과 1950년 10월 30일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3·1독립보병대대(獨立步兵大隊)’가 탄생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기울어 미군은 3·1독립보병대대의 해산을 명령했다. 부대원들이 사령부 건물 앞에서 쉬어 자세로 침묵시위를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과 28일 동안 존재했던 3·1독립보병대대는 전투 한번 치러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휴전협정이 한창 진행 중이던 판문점에서 웃지 못 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북한군에 생포된 재일학도의용군이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해 일본군이 참전했다는 주장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미국 CBS 도쿄지국장이 1952년 9월 ‘일본군의 정체는 바로 조선인 부대’라고 보도하면서 논란이 일단락됐다. 그는 정체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이 조선인 부대를 가리켜 ‘유령부대(幽靈部隊)’라고 불렀다. 국제적으로 한국인 최초의 해외동포 참전의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군 복무를 마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가족이 기다리는 일본으로 속속 복귀했다. 하지만 1951년 10월 2일 일본 사세보 항에 도착한 이들을 마지막으로 일본행 문이 닫혔다. 이듬해 미국과 일본 사이에 채택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면서 의용군 입국 자체가 거부된 것이다. 이들에겐 ‘일본에서 허가를 받지 않고 임의로 출국한 자들’이라는 굴레가 씌워졌고 242명이 한국에 그대로 남아야 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정식 국교가 수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정부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들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부모 형제와 생이별하는 아픔을 겪었고 66년째 그 고통 속에서 살아오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생존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 기념행사를 개최하기도 벅찬 현실이다. 판문점에서 남북한 정상들이 만나 정전체제 종식을 논의하고 평화협정 체결을 논의하는 상황에서도 재일학도의용군참전 스토리는 ‘잊혀진 과거’로 남아있다.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면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고자 했던 이들의 충정이 제대로 평가 받을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