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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6월호 호국보훈의 달 특집] 심장 밑에 있는 나의 총탄... 전쟁이 준 훈장이라 생각
2018.07.12 Views 1357 관리자
“심장 밑에 있는 나의 총탄...전쟁이 준 훈장이라 생각”
류재식
6.25참전유공자회 이사
나는 6.25전쟁의 막바지인 1953년 7월에 적이 나를 향해 쏜 총탄이 내 심장 밑 부위에 박힌 채 65년째 살아가고 있다. 총탄이 나와 함께 하는 이유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하면 6.25전쟁의 참혹상을 말할 수 밖에 없다. 그 과정을 나의 회고담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질 당시에 나는 춘천중(현재 춘천고)5학년이었다. 요즘은 고등학교 2학년에 해당되지만 내가 학교에 다니던 당시 중학교 학제로 6년제로서 나는 5학년 재학 중에 6.25전쟁이 났는데 전쟁이 날 당시에 사회상은 북한의 적화선동으로 무척 어지러운 상태였다.
6.25전쟁 발발과 인민재판
그런 가운데 6.25전쟁이 일어 난 것이다. 6.25전쟁이 일어나니까 춘천에 주둔한 국군부대에서 학생들을 동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탄약이나 보급품을 운반하고 전달하는 일을 시켰다. 나도 3일 동안 열심히 거들고 일하고 있던 과정에서 우리집이 피란을 가야 했다.
우리가 피난을 나가는데 인민군이 남하하는 속도가 우리보다 더 빨랐다. 그러니까 인민군이 남침하는 속도에 우리가 피란하는 것이 제대로 안되었다. 그래서 피란 나갔다가 고생만 죽도록 하고 인민군 치하에 집으로 다시 기어 들어와야만 했다. 그 당시 동네에서 공무원 하던 사람, 그때 당시에 경찰들은 다 도망가고 지주 같은 사람들은 “나는 남 해치지 않고 소작만 줬어”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가 나쁜 일 안 했으니까”하면서 피란을 안 가고 남아 있었다. 동네에서 어떤 일이 벌어 졌는가 하면 동네에서 이 사람들을 잡아 묶어 가지고서 “나는 인민 반역자다, 나는 민족 반역자입니다.” 이렇게 붉은글씨로 쓴 글을 등에다 붙여 가지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인 공회당 앞으로 나오게 해서 인민재판을 여는 것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서로 다 아는 사람들인데도 빨갱이들이 여기 저기 사방에 배치되어서 이장, 지주 같은 사람들을 묶고 끌어다 무릎을 꿇게 앉혀 놓고서 재판을 하는건데 “이 놈이 우리 인민의 피를 빨아 먹고 노동자 농민을 못살게 착취한 놈이니까 악덕지주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을 어떻게 해야 되요?” 하면 여기 저기 숨겨진 빨갱이가 있다가 한 사람이 “죽여라”하고소리치면 이 쪽에서도 “죽여라”하고 저 쪽에서도 “죽여라”하면 다른 우리 사람들은 서로 빤히 얼굴을 쳐다 보는 것이다. 쳐다보면 여기저기서 “죽여라”소리를 하니까 “이건 죽여야 하죠?” 그러면서 “이 친구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고 선언하면서 개울가로 끌고 가 살육을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실제로 목격하고 북한에서 땅을 주고 한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걸 보면서 전부가 놀랐다.
학도병 입대 지원
나는 적 치하에서 인민군으로 입대하라고 하는 바람에 그것을 피해 산 속에 숨어 있다가 밀려갔던 국군이 9.28서울수복을 하고 춘천지역도 수복함에 따라 산 속에서 나와 1950년 9월말에 학도병으로 6사단에 입대를 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냥 수색대가 맘에 들어서 다른 친구들은 덜 위험한 포병부대로 갔지만 나는 6사단 수색중대에 지원을 하여 전투에 참전하였고 적의 수중에 있던 화천수력발전소 등을 공격하는데 앞장을 서게 되었다. 공격을 하면서 옆의 동료가 쓰러지고 죽어나가는데도 나는 공격하여 탈환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무서운 줄을 모르고 선두에 섰다. 화천수력발전소를 점령하는데 내가 일등공신이 되었다. 내가 키가 작아서 M1소총이 내 키만큼 크고 무거워 질질 끌고 다니며 활동하는데 지장이 많았는데 전투현장에서 칼빈 소총을 노획하였다. 소대장이 내게 칼빈소총을 개인화기로 쓰도록 허락하여 주자 분대장을 비롯한 중대원들이 나를 몹시 부러워하기도 하고 시기도 했다. 소대장은 내가 잘 뛰고 명령이 내려지면 제일 먼저 임무 수행을 잘 한다고 기특하게 생각하여 내게 칼빈소총을 전리품으로 사용토록 하였던 것이다.
장교의 길로
그렇게 학도병으로 군번도 없이 전장터를 누비다가 북진 중 간부후보생 모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응시하였다. 장교시험에 합격이 되어 1951년 8월 광주보병학교에 입교하여 뼈와 가죽만 남는다는 고된 훈련을 마치고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장교가 되어 전방으로 나갔다. 갑종간부 10기로서 1952년 1월 19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이후 6사단에서 소대장을 거치면서 1년 6개월간 금성지구 여리지역 전투에 임하였다.
소대장으로 임관된 소위를 그 당시에는 소모품이라고 부르는 실정이었다. 말의 의미상으로는 소모품이라고 한다면 런닝구,팬티가 있고 군복은 내구연한이 정해져 있지만 런닝구, 팬티는 내구연한이 없이 소모품으로 보급하고 있다. 소위가 부대에 전입되었다고 하면 하사관들이 “저 새끼 뭘 할려고 왔냐구”하면서, 전투에 소대장을 앞장 세우는 것이다. 멋모르고 소대장이 나를 따르라 하면서 앞장을 서는 것이다. 적이 보았을 때에는 앞에 오는 놈이 소대장인데 그냥 놔 두지를 않는다. 적이 총을 쏘니까 보직서류에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치거나 죽거나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전투는 중부지방에서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계속되고 있었다. 다 싸우고 수복하면서 문막, 음성을 거치면서 여주를 지나 북진하였다. 남한천지 싸우지 않고 거저 얻은 땅은 하나도 없다고 보며 얼마나 치열한 전투에서 소모품소대장을 장사지냈는지 지금 국립묘지에 묻힌 소모품소위와 우리가 살고있는 이 땅을 맞 바꾼 것이라고 보면 맞는 말이다.
내가 겪은 7월 13일
7월 13일에 적의 대대적인 전쟁 마지막 대공세를 맞이하게 되었다. 나는 소대장으로서 병사는 분대장에게 맡겨서 임무를 수행하게 되고 소대장은 분대장만 통제하였다. 그 때 당시에 장마가 졌는데 금성천이라고 지금 화천에 있는 평화의 댐 꼭대기 상류쪽인데 평상시에는 개울로 있다가 장마가 되면 물이 불어나서 깊이가 우리 키를 넘게 되는 지역이다. 장마를 이용하여 적이 화천수력발전소까지 차지한 다음에 전쟁을 마무리하려고 우리를 공격 해 왔다. 그 때 당시에는 전력난이 있었고 철원평야 쪽에서는 철원평야 땅의 곡식을 차지하려고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났고 중부지역 쪽에서는 화천댐을 점령한 후 휴전하려고 전투를 치열하게 하였다. 밤에 불꽃 튀고 포탄이 떨어지는데 아주 정신없이 떨어져서 옷을 입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전날인가 연대장이 현지 순시를 왔었는데 진지를 둘러 보다가 산 어귀에 만들어 놓았던 나의 참호의 위치가 도망가기 좋게 생겼다고 지적하면서 “요 새끼 너만 살려고 이런 곳에 만들었느냐”고 말하면서 나의 정강이를 군화로 차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당장 옮기라는 지적을 받고서 호를 산 안쪽 비탈로 옮겼었다. 그런데 이게 나를 살린 결과가 되었다. 포탄이 떨어지고 중대장, 소대장, 부대원들이 모두 전사하였는데 나와 소대원 7명만 새로 만든 호 덕분에 살아남게 되었다. 중공군이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치면서 우리쪽 남으로 넘어 오는데 총 한 방 쏘지 못했다. 깜깜한 밤중인데도 그냥 피리소리와 꽹과리를 치는데 혼이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그 다음 날 아침에 날이 밝아 오자 겨우 옷을 주워 입고 여기를 빠져 나가자 하면서 잔여병력과 함께 위쪽 주저항선인 교암산에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 적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숫자가 수 백명은 되었다. 산꼭대기에는 고지를 지키던 아군도 그렇게 많이 죽어 있었다. 주 저항선 지키느라고 당한 희생이었다. 그걸 보고 금성천을 따라서 육지로 가면 중공군을 만날 것 같아 가는 진로에 대하여 고민을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때 고향 춘천에 살면서 물이 있는 고장이라서 물에 단련이 되었고 물을 잘 이용하면 살 것 같아서 강을 따라 이동 하기로 하였다. 소대원들과 함께 물에 들어가서 총을 머리 위로 들고서 걷다가 흐르는 물에 떠밀리면서 물가로 이동하게 되면 다시 반대편 물가를 향하여 떠밀려 이동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남쪽 앞으로 나갈 수가 있었다.
운명의 날 7월 20일
7월 20일 오전에는 내가 가장 아끼던 부하인 이수복 하사가 죽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가 손수 만든 속옷을 내게 선뜻 건넬 정도로 나를 좋아하였다. 우리 둘이 같이 엎드려 이야기를 하는 중에 대답이 없고 소리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려보니 기가 막혔다. 이 하사의 고개가 푹 숙여져 있고 귀에서 피가 쭈르르 흘러나오면서 그냥 푹 수그러지는 것이었다. 이수복하사의 죽음을 보니 “아니 내가 부하를 다 죽게 하고 나 혼자 살겠다는 것이 아닌가”하고 자책감이 느껴졌다. 죽은 친구의 원한을 풀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독기가 잔뜩 오른 나는 이판사판으로 생사를 걸고 싸워야 되겠다고 죽음을 각오했다. 내가 혼자 총을 쏘아대며 중공군 20여 명이 따발총을 쏘는 적진을 향해 돌격했다. 총이나 수류탄을 던질 틈을 주지 않기 위해 전속력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중공군을 향해 그냥 정신을 차릴 틈을 주지 않고 달려 들었더니 겁먹은 중공군은 도망하기 시작했고 상급자로 보이는 한 명이 남았다. 나는 칼빈총을 들고 중공군은 따발총을 들고 동시에 서로 상대방에게 총을 겨눠 발사하였다. 그러니까 중공군과 나는 서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적이 ‘악’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지는 것을 본 동시에 나도 총에 맞아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나의 전쟁은 그 자리에서 끝났다. 당시 내 입에선 피가 계속 솟구쳐 얼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고, 속옷까지 온통 피에 젖었다고 한다.
죽음의 3종류
그 때 당시 어떻게 죽느냐에 따라 하는 말들이 있었다. ‘영원탄’, ‘고생탄’, ‘행복탄’이라고 총탄이나 포탄의 피해를 입은 군인에게 붙이는 이름이 있었다. 부하나 동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하면 “야, 무슨 탄이야”냐고 물어보면 세가지 종류 중 한 가지를 대답하는 것이었다. “영원탄”이라고 하면 적의 총탄이나 포탄에 맞아 단번에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지거나 창자가 달아나거나 바로 참혹하게 죽음을 맞이한 경우를 두고 말하였다. “고생탄”이라면 눈이 다치거나 다리가 잘려서 살아도 평생동안 불편한 장애인으로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을 말했고 “행복탄”이라면 총상으로 관통상 만을 입고서 후방에 후송가는 것을 말하였다. 어느 전우가 행복탄을 맞았다고 말하면 그 친구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우리들 동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고생탄이라고 하면 상처가 어떤 정도인지 확인해서 눈알이 빠졌다든지 턱이 달아났다든지 팔이나 다리나 허벅지가 달아났다든지 하는 상태를 본 후에 그 사람이 안 되었다고동정을 하는 것이었다.
밑에서 지켜보던 부하들이 올라와서 중공군이 쏜 총탄에 피범벅이 된 내 몸을 보고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것이었다. 부하들이 나를 보고서 “아유 그래도 중대장님은 행복탄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의식이 가물거리는데도 ‘행복탄’이라는 그 말을 들으면서 난 한편으로는 안심하면서 의식을 잃었다. 나는 며칠 간 밥도 못 먹고 피를 많이 흘려 거의 죽은 상태였는데 의식이 희미하게 돌아오는 것이었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니까 명찰이 성모라는 위생병이 내 곁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를 부르면서 “내가 장교인데 지금 링겔 하나만 놓아 달라”라고 부탁했다. “다 죽어 가는데 맞으면 천행으로 알고 살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부탁했다. 위생병은 깜짝 놀라면서 “당신 장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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