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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8월호 안보논단]남북 화해 시대의 한일관계 재구축 방향

2018.11.19 Views 1228 관리자

남북 화해 시대의 한일관계 재구축 방향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 

미 제7함대의 모항이자 일본 해상자위대의 자위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일본 요코스카에 가면 미카사 공원이라는 해변공원이 있다. 이 공원에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의 기함으로서 러시아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끈 주역의 하나였던 전함 미카사(三笠)가 양륙되어 있다. 일본 해군상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의 건함계획에 따라 1902년 건조된 미카사호는 기준 배수량이 12천 톤에 달하고, 만재시 배수량은 15천 톤에 달하는 당대 최대의 전함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의 일본 해군은 미카사급의 전함 6척과 1만 톤급 장갑 순양함 6척 등 소위 66 함대를 주력으로 하여 유럽에서 아시아로 회항해온 러시아 발틱 함대를 쓰시마 해전에서 대파하였다.

요코스카를 방문하여 미카사 전함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러일전쟁 와중에 우리 민족이 강요당한 을사늑약과 1910년의 한일강제병합은 당시의 한일간 국력 격차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인이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대한제국을 수립한 이후 고종은 나름대로 근대화 개혁에 착수하고, 그 일환으로 근대적 군사력을 건설하고자 일본으로부터 양무함과 광제함 등의 함선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 함정들은 군함이라기 보다 상선을 개조한 것이었고, 배수량도 각각 3천톤과 1천톤 정도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군사력 건설의 격차가 국력의 격차로 이어졌고, 결국 망국의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매년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될 때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과 그로 인한 우리 민족의 희생이 강조된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으로 19세기 말의 격변기에 국제정세를 내다보지 못하고, 나라를 지킬 국력을 키우지 못한 당시 위정자들의 실책을 반성하는 자세가 요청된다. 일본 요코스카에 남아있는 미카사 전함은 국력양성에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가 각각 맞게 되는 운명이 어떠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역사 공부의 산 재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일본이 강력한 군사력과 제국주의의 국가전략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아시아 대륙을 장악했다고 해서, 동일한 역사가 앞으로도 반복될 것이라고 지레 우려하는 것은 현명한 역사인식은 아니다. 미국은 제국주의 일본과 4년간에 걸쳐 태평양전쟁을 치뤘지만, 전쟁 종료 이후 등장한 냉전체제 하에서 새로운 위협인 소련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고자 미일동맹을 체결하였다. 나치즘에 의해서 피해를 받았던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주요 국가들도 나치즘 패망 이후 6년이 안되어 독일을 나토에 가입시키면서, 소련 공산주의 세력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요컨대 국제사회의 변화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어제의 적대세력을 오늘의 우호세력으로 만드는 안보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1945년 패전 이후 일본은 점령군으로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의 치밀한 정책 하에 다시는 군국주의의 길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국가개조를 단행하였다. 1946년 제정된 헌법에서 전쟁을 국가의 정책수단으로 선택하지 않는다는 점을 명문화하였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육해공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조항도 포함시켰다. 1954년 자위대의 창설 이후에도 전수방위의 원칙, 공격용 무기 비보유의 원칙, 비핵 3원칙 등의 방위정책들을 표명하면서 자위대의 전력이나 활동을 최대한 규제해 왔다. 또한 일본 정부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 2015년의 아베 담화 등을 통해 일본이 군국주의의 전략을 취해 아시아를 포함한 여타 국가들에게 피해를 초래한 점들을 사과해 왔고, 1993년의 고노 담화와 2010년의 간 나오토 담화 등을 통해서는 특히 한반도에 대해 식민정책을 강요하고 위안부 여성들에 대해 피해를 끼친 점을 사과한 바 있다.

물론 1990년대 이후 탈냉전의 국제질서 하에서 일본이 동맹국 미국의 요청과 국내적으로는 보통국가화의 전략에 따라 점차 안보태세도 강화하고, 자위대의 대외적 활동도 확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보통국가화의 동향이 과거와 같은 군국주의로의 회귀로 직결된다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관찰이다. 일본 자위대의 활동이 확대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미일동맹과 유엔의 기치 하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맹국 미국이 일본의 군국주의 회귀를 바랄 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의 핵 및 미사일 능력 개발, 중국의 군사활동 확장을 염두에 둘 때, 미일동맹의 강화는 한국의 대북 억제 능력 및 아태지역 안정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아 우리의 국가이익에 연결되고 있음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일본 내의 극우 성향 인사들에 의해 제국주의 시대 식민정책에 대한 정당화의 시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움직임이 일본 사회 전체를 대표하는 것이 아님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2008년 당시 항공자위대 다모가미 도시오(田母神俊雄) 막료장이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을 때, 자민당 정부의 아소 다로 수상이 그를 즉각 파면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보수적이라는 자민당 정부조차도 극우적 역사인식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로 대응하고 있음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과 일본 간에는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이전에 비해 낮은 상태에 있다. 20186, 일본의 겐론 NPO와 한국의 동아시아연구원(EAI)이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가운데 일본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응답자의 비율이 50%를 상회하였고, 일본인 가운데에서의 같은 응답률도 43%에 이르고 있다. 한국과 일본이 안보상으로는 북한 등으로부터의 위협을 공동인식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을 공유하고 있고, 경제적으로는 자유시장경제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해 왔고, 정치문화적으로도 활발한 정당제도와 민주적 가치를 발전시켜왔다는 공통점을 생각할 때, 이같이 상대국가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낮은 호감도는 우려할 만한 현상이다.

더욱이 안보적인 측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공통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국내외적 규범 때문에 핵무장의 길을 선택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북한 비핵화는 공동의 절박한 과제가 되고 있고, 이를 위해 긴밀하게 협력해야 한다. 지난 4, 남북 정상 간에 판문점 선언이 공표되었고, 6월에는 북미 간에 정상회담이 개최되면서 완전한 비핵화가 합의되었다. 이에 따라 앞으로 전개될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은 동맹국 미국을 정점으로 밀접하게 협력해야 한다.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비핵화의 과정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해야 하고, 만일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의 약속을 지연시키거나, 위반하는 징후가 있다면 재차 강력한 압박과 제재를 위해 힘을 합쳐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등의 결과를 특사 파견을 통해 수시로 아베 총리와 공유해 온 것은 그런 점에서 바람직한 한일 협력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국이라는 공통성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지역은 물론 인도-태평양 지역의 전반적인 질서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해야 한다. 이 지역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중국이 군사력을 증강시키고 그 활동반경을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표방하면서 이에 대응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동맹국인 미국과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이 지역의 안정이 유지되도록 역할을 해야 한다.

나아가, 한국과 일본은 기존에 한중일 협력기구 등을 통해 진척되어온 동아시아 지역협력의 프로그램들을 중국과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 2010년 이후 한중일 정상회의체가 제도화되고 그를 지원하기 위한 한중일협력기구 사무국이 발족하면서, 경제, 사회문화, 비전통적 안보분야에서의 한중일 간의 협력프로그램이 50여 개 이상으로 확대되고 있다. 예컨대 한중일 각국의 대학생들이 상대국가의 대학에서 배우면서 학점을 취득하게 하는 캠퍼스 아시아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고, 각국의 도시들을 문화도시로 선정하여 문화교류와 관광산업을 동시에 촉진시키는 문화도시 프로그램도 잘 진행되고 있다. 각국의 외교안보 연구기관들 간의 상호 교류와 공동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더불어 이같은 3국 협력사업들을 진척시킴으로써 역내 질서의 안정화에 선순환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이같은 중요한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한일 양국은 양자간, 혹은 다자간 차원에서 긴밀하게 정세를 논의하고, 협력의 범위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100여년 전의 대한제국은 미카사함에서 보여지듯이 당시 일본과의 현격한 국력격차로 인해 대등한 국가관계를 형성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21세기 대한민국의 위상은 세계 어떠한 국가와도 당당한 협력관계를 이룰 수 있는 국력 수준을 갖고 있다. 이러한 국가적 위상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미국과의 동맹 등 여러 가지 공통성을 공유하는 일본과 역사적 갈등을 뛰어넘어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의 국가이익에도 부합된다. 실은 20여년 전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과 일본의 오부치 수상은 이러한 인식에 바탕하여 양국이 역사를 직시하면서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하자는 취지의 공동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 20여 년을 돌아보면, 양국은 미래지향적 관계를 건설하기보다 역사적 기억에만 집착해 오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판문점 선언과 북미정상회담으로 인해 한반도와 동북아 지역의 질서가 급변하는 조짐을 보이는 이 시기야 말로, 한국과 일본이 보다 바람직한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협력질서의 비전을 공유하면서,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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