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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9월호 권두언]독일 통일에서 배운다

2018.11.19 Views 1185 관리자

독일 통일에서 배운다

 

송창섭 시사저널 기자(정치국제팀)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에 대한 독일 내 평가는 분명하게 나뉜다. 기본적으로 슈뢰더의 정치성향은 중도좌파다. 그를 알기 위해선 슈뢰더를 총리로 만든 사회민주당(SPD이하 사민당)부터 살펴보는 게 먼저다. 사민당은 독일에서 가장 오랜 정당으로 1879년 만들어진 바이마르 사회민주당에서 출발했다. 여기에 1945년 사회주의 노동당 등 좌파 군소정당들이 합쳐지면서 사민당은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중도좌파 정당이 됐다.

유럽이 사회민주주의의 본산이지만 처음부터 사민당이 국민들의 호응을 얻은 것은 아니다. 사민당 열풍이 불어 닥친 것은 1969년 무렵. 그 전까지만 해도 독일(서독)은 중도우파가 득세하는 구조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서방진영의 주도 아래 국가가 세워지다보니 공산주의를 배격하는 중도우파가 국민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랬던 독일에 사민주의 열풍이 분 것은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그게 1969년 현실화됐다. 당시 치러진 총선 출구조사에서 당초 과반수는 기민기사당 연합이 차지할 것이 확실했다. 대부분의 언론이 그렇게 예상했다. 하지만 오후 930분부터 결과가 뒤집히더니 중도좌파 성향의 사민자민당 연합은 오후 10시를 넘겨 당시 집권 여당인 기민기사당 연합을 밀어내고 과반을 6석 넘기는 신승을 거뒀다. 이 때 독일에 사민당 열풍이 불게 만든 이는 훗날 비전의 정치인이라 불린 빌리 브란트다.

흔히 빌리 브란트가 동구권 국가들과 관계 개선에 나선 외교정책을 가리켜 동방정책이라고 부른다. 이 때 빌리 브란트가 꿈꾼 것은 먼 훗날일지 모르는 독일의 통일이었다. 당장은 실현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이뤄야할 목표를 위해 빌리 브란트는 모스크바바르샤바조약, 서독 정상회담 등을 이뤄냈고 197211월 기본조약을 체결했다.

우리도 그렇지만 독일 통일도 쉬운 게 아니었다. 언제나 그렇듯 통일에 대한 회의감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빌리 브란트 역시 통일회의론이 일 때마다 한번 결혼한 부부는 헤어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난다는 말을 남기면서 통일의 불꽃이 꺼지지 않기를 노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은 자신의 재임기간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몇 년 후 정권이 헬무트 콜이 이끄는 기민기사당 연합으로 넘어가면서 독일 통일은 먼 이야기가 될 뻔 했다. 역사는 아이러니라고 했던가. 정작 통일은 기민당 정권 아래에서 맞이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을까. 바로 여기에 독일 통일의 성공 비결이 숨어 있다. 기본적으로 통일에 대한 아젠다는 빌리 브란트와 사민당의 작품이다. 굳이 따지면 저작권은 빌리 브란트와 사민당에 있다고 봐야 한다. 만약 우리 정치권이었으면 전임 정부가 했던 과제는 싹다 지우고 새롭게 정책을 세우는 게 기본이다. 그런데 독일은 그러지 않았다. 헬무트 콜은 비록 경쟁자가 입안한 정책이지만 독일의 미래를 위해서는 중요하다고 판단, 빌리 브란트의 통일 정책을 계승했다. 그것도 모자라 프랑스, 영국, 소련 등 이웃 국가들을 돌며, 독일의 통일이 유럽 나라들에게 결코 나쁜 결과를 만들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베를린 장벽은 무너지고, 1990년 서독과 동독은 하나의 나라가 됐다.

그 다음 정권을 잡은 이가 바로 사민당의 슈뢰더다. 빌리 브란트를 정치적 스승으로 두고 있어서 그런지 슈뢰더 역시 기본적으로 중도좌파 성향이 짙다. 그렇다고 그를 사민주의라는 프레임에 갇힌 정치인으로 봐서는 안 된다. 슈뢰더에게 우선 순위는 당장의 정권 연장 보다 국가의 안위였다. 정권을 잡자마자 친 기업 성향을 보인 것이 대표적이다. 그의 친()기업 행보는 전임 콜 정부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그러다보니 정작 그를 총리라는 자리로 이끈 사민당에게 슈뢰더는 지금도 공공의 적이다.

일각에서는 사민당이 20년 내 원내 제1당이 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슈뢰더는 재임 기간 지지층인 노동자층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폈다. 그랬기에 당시 사민당의 일부 세력은 탈당해 좌파당을 만들기까지 했다. 지금도 슈뢰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슈뢰더 때문에 독일의 중도좌파 세력이 위험해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국가의 미래를 생각한 정치인이라는 찬사가 끊이지 않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필자가 지난 7월 초 독일에서 슈뢰더를 만난 것도 한국과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다. 지난해 펴낸 자서전문명국가로의 귀환에서 슈뢰더는 한국은 특별히 기억에 남는 나라임을 강조했다. 책에서 슈뢰더는 무엇보다 한국이 자신의 조국 독일처럼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나라여서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한일 관계가 아직 해결점을 찾지 못한 점도 아쉬워하면서 자신의 주도한 경제사회개혁 프로그램 아젠다2010’이 한국에서 꽃피우기를 기대했다. 최근 한국인 부인까지 맞이하면서 슈뢰더는 남은 여생의 절반을 한국에서 보내겠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있다.

퇴임 이후에도 슈뢰더는 독일 연방하원(Bundestag) 내 사무실을 두고 있다. 당초 슈뢰더와 인터뷰가 예정된 시각은 74일 오전 10시였다. 필자는 약속 시간보다 30분 앞서 독일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연방하원 건물에 도착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 되서야 근처에 의회 건물이 여러 채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옛 동베를린 방향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Under Den Linden) 거리를 따라 5분가량 가니 50번지에 또 다른 연방하원 건물(Deutscher Bundestag Platz der Republik 1)이 나왔다. 이곳에 슈뢰더의 사무실이 있다.

슈뢰더는 독일의 전직 국가원수로서는 유일하게 살아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다보니 독일 내 관심도 많다. 이날 슈뢰더와 대담을 마치고 인근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을 향했다. 프로이센 제국 시절 지어진 브란덴부르크 문은 분단 시절 동서독의 경계다. 별도의 수행원 없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가는 동안 슈뢰더는 자연스럽게 시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경호 인력이 따라붙지 않다보니 군중 속에서 슈뢰더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시민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고마워요. 슈뢰더라고 말하자, 그 역시 고맙다고 화답했다. 슈뢰더에게 이런 식으로 시민들과 자주 만나느냐고 묻자 정치인이라면 모름지기 시민과 자주 만나야 하는 게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슈뢰더와의 대담 주제는 통일로 한정지었다. 그는 남북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가능케 했다면서 이번 회담을 성공적으로 평가했다. 솔직히 독일 사민당의 재집권은 옛 동독지역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일까. 슈뢰더는 통일 직후 연방총리청을 옛 동독 국가평의회 건물에 임시로 뒀다. 인터뷰에서 슈뢰더는 베를린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오늘날 베를린이 뉴욕, 파리, 런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슈뢰더의 적극적 재건 정책이 큰 밑거름이 됐다. 그는 인터뷰 내내 문재인정부의 화해 정책을 가리켜 작은 걸음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빌리 브란트가 일관되게 말한 작은 걸음 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작지만 여러 차례의 대화가 통일이라는 큰 걸음으로 연결됐다는 게 요지다.

현재 우리는 남북 대화 자체를 놓고 이념 논쟁이 한창이다. 동방정책을 보는 시각 자체가 다르다. 진보 정부에서는 빌리 브란트의 평화와 포용정책을 강조한 반면, 보수 정부에서는 체제 우월성을 갖고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한쪽은 과정, 한쪽은 결과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 수십년 동안 반복되면서 갈지자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는 사이 북한은 핵무력을 완성하고 미국과 협상에 나서고 있다. 지금이야 미국과의 협상에 있어 남한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협상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면 남한 패싱이 재현되지 말란 법이 없다. 미국과의 신뢰도 바닥일 뿐더러 우리와의 신뢰도 그다지 깊지 못하다. 이 상황을 슈뢰더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슈뢰더의 말이다.

진보 정부의 정책이 결국 옳았다는 건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빌리 브란트에서 시작된 작은 걸음의 정책들이 결국 신뢰를 구축했다. 기민당은 오랜 기간 빌리 브란트가 맺었던 조약·협정들을 배척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헬무트 콜은 총리가 된 후 오히려 빌리 브란트 정책들을 이어나갔다. 그것이 통일을 이뤄낸 것이다.”

그렇다면 서독이 동독을 흡수통일한 것을 어떻게 봐야하나. 그는 이 부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체제 우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동독의 체제 붕괴는 자체 스스로의 열망이 결집됐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그는 독일의 통일 방식을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슈뢰더는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구축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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