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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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10월호 국군의날 특집]나의 6.25참전기

2018.11.19 Views 1604 관리자

나의 6.25 참전기
이창건
 
10, 국군의 달을 맞이하여 호국의 최일선에서 불철주야 헌신하고 있는 장병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본인이 KLO대원으로서 6.25전쟁에 참전했던 참전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전쟁 때 나의 소속 부대였던 KLOKorea Liaison Office의 약자로서 해방후 미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며 남겨놓은눈과 귀 기능의 비밀조직을 말한다.
처음엔 북한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분석하는 수동적 임무 수행에 국한했으나 6.25 사변이 일어나자 활동범위와 조직 및 인원수가 늘어나면서 전략 관련 정보 수집에 뛰어든 능동적 조직으로 변모했다. 학생이던 나는 6.25 발발과 함께 선배의 권유로 KLO에 입대했는데 임무는 북한군의 동태 살핌과 중공군 및 소련의 북한군 지원 현황 탐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은 주로 북한에서 피난 온 사람들, 평안도 출신이 맡았는데 나는 평안도 지리에 익숙한 그곳 출신이고 사투리를 제대로 구사한다 하여 면접시 가산점을 받고 입대한 경우이다. 그런데 북한 피난민 수가 워낙 많아 북한 전문가 모집은 Buyer`s Market, 즉 수요자측이 배짱 튕기는 형편이었다. 나는북한 정권이 가장 싫어하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KLO에 알맞은 신분이었다.
다만 그것을 입증하는 객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경우 나를 추천한 선배님과 선배님이 끌어들인 KLO 간부가 공동으로보증을 섰고 또 월남 후 공산분자들과 싸운 나의 서북청년으로서의 학생신분과 어학능력도 참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1. 인천 상륙작전
KLO의 업적 중에는 인천상륙작전 준비와 그 길잡이 역할을 꼽을 수 있다. 1950년 북한군의 기습공격으로 남한이 유린당하자UN군은 적의 뒤통수를 치는 방법으로 전세역전을 모색했음은 우리가 아는 바와 같다.
당시 일본 동경의 GHQ (General Headquarters, MacArthur 사령부) 주변에선 상륙지점으로 원산, 삼척, 포항, 군산, 인천, 진남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것은 일제 시 거기에서 근무하던 항만 관련 일본인들을 미군 정보기관에서 면접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며, 그 사실이 한국에까지 알려진 것이다.
그때 나는 입대 후 훈련받고 있어 나중에 들은 이야기이지만 KLO 대원들은 이미 경기만의 덕적도에 Base Camp를 차려놓고거기에서 동쪽 30km 거리의 영흥도에 현지인들을 포섭한 수색대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GHQ의 미군이 전에 한반도항구에서 근무했던 여러 명의 일본인들을 만난 것은 적의 판단에 혼선을 일으키려는 작전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본다.
그때 중국은 적성국(敵性國)이라 기상자료를 일체 내놓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한일 양국은 물론 일본 주둔 미 공군은 일기예보에 어려움이 많아 한반도에의 폭격기나 전투기 출격 전에 반드시 정찰기를 띄워야했다. 그런데 정찰기는 느리고 비무장이어서 소련 PilotMIG 전투기에겐 마치 잠자리와 제비 격이었으므로 출격한 정찰기의 희생이 너무도 컸다. 그러던 것이 북한의 몇몇 산 정상에 KLO 기상 부대를 상주시킨 다음부턴 정찰기가 필요없게 되어 미공군 병사의 희생과 정찰기 손실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공로가 크다 하여 KLO는 미 국회의장의 상을 받았다 (우리는 그 상장을 분실, 찾지 못했다).
MacArthur 사령관은 인천상륙에 앞서 한미 6인조의 특공대에게 팔미도에 침투해 적을 소탕하고, 등대에 불을 밝히며, 서쪽벽에 성조기를 내걸고 조명을 밝히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 작전 책임자는 유진 클라크 미 해군대위였고 대원 중엔 KLO의 최규봉 대장(隊長)이 있었다.
역사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그 파급효과 위주로 기록하지만 나는 그때 희생된 KLO 동지들과 주민들의 얘기도 부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본다. 팔미도 특공대 6인조를 뒷바라지 하던 영흥도 주둔 KLO 수색대 17명과 지역주민 여러 명은 특공대가 떠난 914일 밤 UN군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아군이 며칠 동안 인천 지역을 집중적으로 포격폭격했고 기뢰를 폭파했으며 또 지평선에 200척의 UN군 함정들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막걸리를 기울이며 느긋하게 희소식을 기다리고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그들은 영흥도 옆의 다부도에서 쳐들어온 북한군의 기습을 받아 모두 몰살당하고 말았다. 북한군과 연계된 자가 현지인 중에 있었던지 아니면 옆 마을사람의 고자질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영흥도 주민 여러 명의 제삿날이 다 같은 것은 원통한 일이고 이것은 지역주민들에게 너무도 미안한 일이다.
2. 화천철원 탈환
이승만 대통령이 Van Fleet 8군 사령관에게 철원과 화천지역 탈환을 간곡히 부탁한 것은 철원이 곡창지대이고 화천엔 최대의 수력발전소가 있으며 그 지역을 흐르는 북한강은 수도권 수자원의 요충지인 까닭이었다. 사령관은 대통령의 경륜에 감동해 그렇게 해 보겠노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Van Fleet는 유능한 지휘관이었다. 우선 그는 공군에 의뢰해 그 지역 정찰부터 시켰다. 그랬더니 거기엔 중화기로 무장한 중공군 대부대가 주둔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Van Fleet거기를 폭격하라고 명령했더니, 폭격 당한 그곳엔 얼마 후 탱크와 야포가 다시 전개되는 것이다. 거듭된 폭격에도 그같은 일이 반복되자 Van Fleet 장군은 KLO에게 그 지역 실사(實査)를 요청하게 되었다.
KLO본부에선 3팀을 구성해 사전훈련 후 출발전 북한과 중국 화폐, 중공군 무기와 군복, 중국 물건, 각종 최신 정보, 중국 발행의 지역 지도 및 중국 공산당 특별감찰관 신분증을 지급했다. 3팀 중 하나는 잠수정으로 해금강에 상륙했는데 거기엔 오죽송 동지가 있었다. 만주에서 태어난 그는 중국인 마을에 살며 중국인 친구들과 유치원 때부터 학교에 같이 다녀 우리말 보다 중국어가 더 유창했다. 그들은 해금강에서부터 중공군부대에서 숙식했으며 목표 지점에 도달해서는 현지주둔 부대장이 마련해 준 곳에 자리잡고 지역정찰에 나섰다.
그들이 목격한 탱크와 대포는 전나무를 깎아 만든 모조품이고 공중 카메라에 잘 찍히기 위해 표면에 페인트칠을 한 가짜들이었다. 오죽송 동지가 똑똑한 것은 그런 목재 모조품 옆에서 찍힌 자신의 모습만이 아니라 숲속에서 작업하는 목수들, 페인트통, 각종 도구류, 계곡에 버려진 나뭇가지들 그리고 공습경보가 울리면 목수 부대원들이 숨는 동굴 모습까지 필름에 담아온 것이다.
그 사진들을 본 Van Fleet 사령관은 씩 웃더니 8군 장병들에게 진격명령을 내려 목수부대가 주둔하던 화천철원지역을 무혈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허허실실 전략에 거꾸로 당한 중공군은 빼앗긴 전략 요충지를 탈환하려고 2개 군단을 동원, 남하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중공군이 반격해 오리라는 것을 예측한 미8군은 요충지 여러 곳에 강력한 야포부대를 배치하여 남하하는 중공군을 손쉽게 때려잡았다. 그때 화천 저수지엔 18구의 중공군 시체가 떠내려왔다고 한다.
그 전과를 보고받은 이승만 대통령께서는 그곳이 오랑캐무리(, )를 무찌른 (, ) 호수라는 뜻으로 저수지 이름을 파로호라 이름지었고 군은 그 휘호를 비석에 새겨 저수지 옆에 세웠다.
3. 중공군 병참기지 탐지
황해도 내륙의 구월산엔 수백명의 반공청년들이 임진왜란 때의 의병들처럼 산속 깊숙이에 진치고 있으면서 후방의 북한군과 중공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KLO는 그들에게 가끔 보급물자를 지급함으로써 우리 대원들을 많이 투입하지 않고도 목적하는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다. 구월산은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북위 38.5도상의 초도에서 동쪽 40km 지점의 내륙에 위치해 있고 해안에서는 30km 밖에 안 된다. 그러므로 30km만 통과하면 반공청년들이 진치고 있는 안전지대에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
KLO는 그 30km 사이의 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왔고 우리 부대엔 그 지방 출신도 있어 해안에서 구월산까지에 인민군과 중공군 부대가 어디에 주둔해 있고 어느 샛길이 안전하다는 것까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월산에 갔다 오는 것을 외갓집 출입이라고도 할 만큼 쉽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구월산 인근 여러 곳에 중공군 병참기지가 산재해 있다는 주민들의 얘기가 계속 들어왔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정식으로 상부에 보고하려면 물적증거를 제시해야 함으로 우리는 그 지역 출신대원을 안내자로 삼아 현지에서의 확인작업에들어가기로 했다.
소문대로 중공군 병참기지 사령부는 옛 신천 전매청 건물에 있었고 군수물자는 황해도의 지방도로 옆 수십 군데에 널려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먼 산에서 망원 렌즈 달린 카메라로 촬영해 왔다. 그러나 우리가 철수할 때 중공군과의 충돌이 있어 경상을 입긴 했으나 그래도 원하던 증거물 확보엔 성공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귀대 즉시 필름을 현상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상부에 올렸다. UN군은 우리 보고서가 지적한 황해도 여러 곳에 정찰기를 보내 진위를 파악하는 작업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미 공군 폭격기 편대는 정찰기가 점 찍어준 병참기지들을 연일 폭격에 폭격을 가해 여러 날에 걸쳐 병참물자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만일 그 병참물자가 건재했더라면 중공군은 남해안까지 밀고 내려왔을 것이라는 것이 그때의 평가였다.
그때 우리는 지방민과의 유대관계가 임무수행에 얼마나 요긴한지 뼈저리게 느꼈다.
 
4. 공중 탈출장비 개발
북한 내륙 깊숙이에 침투해 작전중 부상당했거나 요긴하고 무거운노획물을 확보했거나 또는 적의 주요인물을 납치했을 경우 어떻게 안전하게 돌아오느냐는 우리에게 크나큰 과제였다.이 어려움 때문에 대원들은 내륙지방으로의 침투를 늘 꺼렸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는 비행기에 끌려올라갈 때의 충격최소로 하는 장비를 만들어보기로 했는데 그러려면 충격흡수장치 (Shock Absorber)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나는 기계과 출신 선배의 도움을 얻어 충격흡수장치를 만들어 수십번 실험에 실험을 거듭한 후 실전에 배치했는데 그 얼개가 그림과 같은 것이다.
산 정상의 나무를 다 자르고 양쪽에 남겨둔 두 나무에 충격흡수장치가 달린 줄을 매놓는다. 그리고 또 다른 충격흡수장치가 달린 줄 끝에 갈고리를 달아 그것으로 나무에 연결한 줄을 비행기에서 낚아채 끌어올리는 방법이다. 그때 줄에 매달린 사람이 받는 충격은 낙하산 타고 착지(着地)할 때보다 적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내륙지방에의 침투를 꺼리던 대원들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이에 자신을 얻은 우리는 함경도와 평안도 내륙지방에 2개 부대를 투하함으로써 그간 미루어왔던 대형작전을 수행키로 했다. 우리는 자신만만하게 대원들을 내륙 깊숙이에 투하해 기지를 구축했으며 모든 일이 계획대로 추진돼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어느날 양측이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했다는 뉴스가 발표되었다.때는 1953727일 오전이었다. 이를 어쩌나, 북한에서공작 중인 대원들과 특히 최근에 보낸 두 부대원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들을 안전하게 데려올 수 있을 것인가? 앞이 캄캄했다.
부대에 들어가니 모두가 문제 제기만 할뿐 어느 누구도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북한에 침투해 있는 대원들로 부턴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는 전문이 계속 들어왔으나 우리는 만족할만한 답변을 하지 못했. 며칠 동안 잠을 못 잔 나는 다만 모두의 안녕을 기원할 뿐이었다. ‘우리를 배반하고 저주하더라도 제발 살아만 다오를 바라며 기도할 뿐이었다.이것이 자그마한 기술적 성공이 커다란 전술적 실패의 원인이 된 경우이다.
그때 우리가 중공군과 북한군을 압록강두만강 북쪽으로 내쫓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 그러나 이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렇게 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 우리에게 부과되어 있음을 인식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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