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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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10월호 국군의날 특집]68년만의 귀환
2018.11.19 Views 1221 관리자
68년만의 귀환
이학기
유해발굴단 단장
68년만에 다시 만난 23살 청년 남편과 89살 할머니 아내
지난 9월 6일 경남 통영시에서는 故 이등중사 김정권님의 129번째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가 있었다.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는 6․25전쟁 당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나 미처 수습되지 못한 채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계신 전사자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모시는 행사이다. 행사에는 아내 이명희(89)씨와 아들 김형진(69)씨 등 유가족과 통영 시장을 비롯한 지방자치 단체, 보훈단체, 군 관계자 등 40여명이 참석해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이제라도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남편을 전쟁터에 떠나 보낸지 68년만에 다시 만난 이명희 할머니는 남편의 귀환 소식에 휠체어에 병든 몸을 의지한 채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렸다.
故 김정권 이등중사는 1928년 경북 의성군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아내 이명희씨와 결혼했다. 당시 아내는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돼 한국어가 서툴렀으며, 이런 아내를 위해 밤마다 한글공부를 가르칠 정도로 자상한 남편이었다고 한다. 1950년 7월에는 아들 김형진씨를 낳아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이들 부부도 전쟁의 화마는 피해갈 수 없었다. 23살의 건장했던 청년은 1950년 8월 31일 피난길에 국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며, 그 모습이 피붙이 아들을 업고 두려움에 떨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아내와의 마지막이 되었다. 그로부터 68년이 지나서야 23세의 젊은 남편과 89세 할머니 아내는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故 김정권 이등중사는 경산․영천 일대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고 1사단에 배치되었으며,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평양 탈환 작전에 참여하며 북한의 평안북도 운산지역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거센 공세로 국군은 다시 임진강까지 후퇴하였으며, 김 이등중사는 임진강 - 서울 서북방 지역을 방어하기 위한 델타방어선전투(1951.4.25~4.27)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김형진씨는 아버지의 귀환을 ‘기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68년만의 아버지와의 만남에 대해 담담하게 글을 읽어간다.
“68년만에 귀환” - 故 김정권 이등중사의 아들 김형진씨가 보내온 글
우리 식구들이 포격과 총탄을 피해 청도 근처까지 떠밀려 오던 1950년 8월 31일, 낙동강 전선에서 마지막 교두보를 형성하던 국군은 부족한 병력수급을 위해 피난민들 사이에서 젊은이들을 징발했다. 아버지도 그속에 포함되셨고, 1사단에서 기초군사교육을 받고 바로 최전선 전투 요원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 우리에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소식은 10월 평양에 입성하였다는 편지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후 중공군의 공세로 임진강까지 후퇴하고, 1951년 4월 27일 아버지는 파주 인근의 전투에서 실종되셨다.
당시 실종이란 통보는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이다. 전사하셨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였다는 뜻과 생존해 있지만 포로가 되어 북한에 잡혀 있다는 의미다. 후자에 방점을 찍은 할아버지는 휴전 후 포로 교환이 있을 때마다 돌아온 사람들을 만나로 다녔고 포로수용소에서 아버지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우리 가족들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아버지는 살아있다고 믿었다. 남북 고위급이 손을 맞잡고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할 때는 금방이라도 아버지가 대문 열고 집으로 오실 것만 같았고,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 때는 눈물 바람으로 온종일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저울질하던 나는 10여 년 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보건소에 가서 6·25전사자 신원확인에 필요한 유가족 DNA 시료채취를 하고 돌아왔다. 피난 도중에 아버지와 헤어진 지 68년이 지난 ‘18년 7월 5일,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에서 전화를 받았다. 99.9999% 일치하는 유해를 찾았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였다. 우리 가족이 숙명처럼 그리워 하던 분. ‘살아있다’는 강한 믿음을 지금까지 주셨던 분. 아! 나의 아버지.
세상은 신앙의 눈으로 보면 기적 아닌 것이 없다고 한다. 꼭 신앙이 아니더라도 여러 가지의 현상들이 신기하게 합쳐지면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세상에는 수많은 기적이 보인다. 13만 3000여명의 전사자 중에서 유해를 수습한 분이 1만여명. 그중에서 지금까지 유전자 검사가 일치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분은 단 128명뿐이었는데, 129번째로 나의 아버지가 우리 품으로 돌아오신 것이다. 확률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귀환이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날은 7월 5일이었는데 이날의 나의 생일이자 아들의 생일이었다. 아버지는 신기하게도 아들과 손자의 생일날에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사진을 잃어버려서 우리 집에 아버지 사진을 단 한 장도 없었다. 그런데 유전자가 일치되었다고 통보를 받기 며칠 전, 서울 고모님이 자기의 옛 앨범속에서 그 사진을 거짓말처럼 발견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비슷한 시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 이 서너가지 현상들의 교집합을 기적이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다.
68년간 파주 광탄면 박달산 기슭에 외롭게 묻혀 있었던 아버지가 부활하셨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애국자요, 호국의 영웅이셨음에도 그동안 자식에게 제사상도 못 받으셨던 아버지가 당당하게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고, 가족으로 존경심을 얻고 앞으로 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자손들의 영광스러운 조상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하다. 어머님 살아생전에 아버지를 찾아주신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자랑스럽다.
8년 전 유가족 DNA 시료채취가 무명용사의 이름을 찾아주다.
故 김정권 이등중사의 귀환 뒤에는 유가족들의 적극적인 DNA 시료채취 참여와 6․25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한 국유단의 노력이 함께 있었기에 가능했다. 만약 국유단에서 유해를 찾지 못했다면 유가족들은 평생 남편과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상처 속에 살아갔을 것이다. 또한 아들 김형진씨가 2010년 통영 보건소에서 유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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