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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3월호 권두언] 국가주권과 국가안보
2019.05.17 Views 969 관리자
국민 주권과 국가 안보
- 한말 국가 위기와 국민주권의 민주공화정-
이 정 은
3.1운동 기념사업회장
위의 그림은 보스톤 미술관에 소장된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
한국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해 왔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세력이 동아시아까지 밀려 올 때 조선은 더 이상 고요한 아침의 나라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외적 위기에 대응하여 만반의 안보태세를 갖추어야 할 그 시기에 세도정치 60년의 온갖 부정부패로 ‘고요히 잠자는 썩은 나라’가 되어 대외 위기에 봉착했다.
1882년 임오군란은 개항과 개혁을 추구하던 고종 측근의 부패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1884), 동학농민운동(1894) 등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고종은 청국군에 도움을 요청했다. 외압 상황에서 국왕은 국가 안보보다 왕실 안보에 더 급급했다. 그것이 외세의 내정간섭을 불러들였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 1895년 왕비 민비(후에 명성왕후 추존) 참살, 국왕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신변 위탁(아관파천), 외국세력의 조선 이권 침탈 등 국가와 국권, 국익의 위기상황이 계속되었다. 국왕 1인이 지배하는 전제주의의 한계가 명백하게 드러났다.
1898년 3월에 촉발된 독립협회의 국권수호운동이 대규모 군중대회인 만민공동회로 이어지고, 그것이 의회수립운동으로 나아갔다. 국가위기 타개를 위해 국민의 의사 수렴, 국민의 힘의 결집이 절대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나온 운동이었다. 실추된 국가 위신을 만회하기 위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 위에 오른 광무황제(고종)는 여러 차례 민중들의 의회설립요구를 거부하다 1898년 11월 28일 마침내 중추원을 의회로 개조하여 이승만 등 50인의 의관(議官: 오늘날 국회의원)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중추원 의회는 황제가 군림하는 상태에서 오늘날 국회와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처음엔 50명 의원을 황제가 1/2을 임명하고, 독립협회가 1/2을 선거한다는 안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제권 축소를 극도로 꺼려했다. 결국 민선의원은 1/2에서 1/3인 17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설립 1달도 안되어 12월 25일 독립협회와 함께 폐쇄되고, 의회설립운동을 주도했던 이승만 등은 투옥되었다. 그리고 헌법 연구를 통해 1899년 7월 14일 ‘대한국 국제(國制)’를 반포했다. 대한제국의 주권은 앞으로 영원히 황제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민의에 대한 반동이었다. 그후 6년만에 대한제국은 을사조약, 그리고 5년 후 병합조약에 의해 나라가 망했다. 국민들의 의사를 국정에 수렴하고 반영하는 제도를 만들었다면 더 나은 대응을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더구나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강제 퇴위를 당하자 “황제가 잃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국민주권론’이 본격 대두되었다. 미주 동포들은 안창호와 공립협회 임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신민회 운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황제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공화제를 표방하지는 못했으나, 공화제를 포함한 문명적 가치, 국민의 경제적 자립, 납세 등의 의무를 통한 민주국가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가르침으로써 공화제 훈련과 준비를 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미주 한인사회에서 “구한국 멸망, 국민주권의 신한국 시작”으로 받아들였다. 임시정부 건설론이 본격 제기되었다. 박용만은 무형국가론(1911)을 제기했고, 미주 한인 단체들은 통합하여 해외 한인 최고 기관이자 임시정부격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했다.(1912. 11) 대한인국민회는 지방총회, 지방회 등을 통해 한민족 글로벌 네트워크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조직화했다.
그 시기 청국에서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 황제체제가 무너지고 쑨원을 임시 대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대전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항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의 군국주의적 전제국가에 대해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민주국가가 대결했다. 대전은 민주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대전의 와중에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차르체제 또한 붕괴되었다. 세계가 민주공화정의 방향으로 큰 변화를 하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의 “신천지가 아전에 전개되도다”고 한 구절은 이러한 세계사적 변화를 말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망국, 국민주권론과 임시정부 수립론의 대두, 청국의 신해혁명,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주제 국가들에 대한 민주주의 국가들의 승리, 러시아 혁명 등 국제정세의 대변화에 부응하여 신규식 등 해외 독립운동가 14명이 「대동단결선언」(1917)을 제기했다. 이 선언은 주권불멸론(主權不滅論)에 입각하여, 1910년 순종의 주권 포기는 곧 국민에 대한 주권양여로 보고, 일본이 국토를 강점하고 있으므로 재외 동포가 민족대회의를 개최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종전되고, 독일, 오스트리아 등에 공화정이 수립되는 등 세계에 공화정의 시대가 본격 도래하고 있는 것을 실감하고 있던 차,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고종)가 승하했다. 고종의 서거는 조선과 대한제국 500년 간 왕과 황제의 시대가 최종적으로 ‘사망’하였음을 의미했다. 국민들은 고종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전민족적인 3ㆍ1운동에 나섰으며, 동시에 새로운 공화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나아갔다.
3ㆍ1운동의 발발과 거의 동시에 국내외 동포사회에서 자주독립의 민주공화정 수립 선포가 잇따라 터져 나왔다. 3월 21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에서 한성정부 수립이 선포되었다. 기타 여러 곳에서 한민족의 독립된 정부수립의 요구가 분출하였으며 이들 모두 민주공화정을 표방함으로써 국민주권론과 세계사적 시대변화를 반영하고 있었다.
1919년 4월 1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 김신부로에 위치한 2층 양옥에 독립운동가 29인이 모였다. 참석자들은 이동녕(李東寧)과 손정도(孫貞道) 목사를 의장과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여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회의를 계속했다. 이날의 제1회 회의에서 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에 안창호 등의 각료를 임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격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 「임시헌장」은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결의로 임시헌장을 선포한다’는 선포문과 함께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하여, 극호와 국체, 정체를 밝히는 등 10개조의 건국 정신과 기본 원칙을 천명하였다. 임시헌장은 민주주의 원리에 기초한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가.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한다.
나. 정체는 민주공화정으로 한다.
다. 대한민국의 통치는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수행한다.
라. 대한민국 국민은 남녀, 귀천, 빈부의 계급이 없이 평등하다.
마. 대한민국 국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거주이전 및 신체 등 일체의 자유를 누린다.바. 대한민국 국민은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고, 교육, 납세 및 병역의 의무를 진다.
사. 대한민국은 건국정신을 세계에 발휘하여 인류문화와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한다.
아. 그 밖에 구황실을 우대하고, 국토회복 후 1년 내에 국회를 소집하도록 규정하여 해방 후 정부수립까지 염두에 두었으며, 정부가 수립될 때 의정원을 국회로 바꿀 것임을 명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는 5개월 뒤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를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그후 광복의 그날까지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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