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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4월호 권두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을 되새기자

2019.05.17 Views 1139 관리자

이순신 장군의 유비무한을 생각한다.

 

제장명(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

 

손자병법에 보면 백번 싸워 백번 승리하는 게 전쟁에서 최상이 아니라 적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라고 말한다(不戰而勝). 군대가 존재하는 1차적인 목적은 전쟁을 억제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승리하더라도 전쟁의 상처는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계층은 힘없는 백성들일 것이다. 따라서 국가 지도자들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차선책을 강구해야 한다. 이것은 그 전쟁의 규모나 치열도 등이 더욱 확대되는 위험성을 억제해야 함을 말한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의 정치·외교적인 활동도 중요하지만 군 자체적인 노력도 중요하다. 군 자체의 힘만으로 전쟁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지만 제한적인 영역에서의 전쟁 억제는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를 임진왜란 시기 충무공 이순신으로부터 찾을 수 있다.

이순신장군은 15912월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후 유비무환의 자세로 전쟁을 대비해 나갔다. 대다수가 전쟁을 예견하지 못한 채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나라를 근심하던 외로운 장수였던 이순신은 홀로 미래전을 구상하고 준비해 나갔다. 주력군선인 판옥선을 정비하고 거북선을 개발하는 등 전력을 강화하면서 휘하 장졸들의 전투수행능력과 전투의지를 제고시켜 나갔다.

이렇게 이순신이 전쟁에 대비하고 있을 때 조선 조정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일본군을 바다에서 막지 말고 육지에서 성을 쌓아 막으라고 지시하였다. 일본은 섬오랑캐이기 때문에 당연히 육전보다 해전을 잘할 것이라는 단순한 추정에서 비롯된 판단이었다.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 이전 100여 년간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치면서 육전 수행 능력이 뛰어났으며 오히려 해전술은 원시적인 해적전술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에 조선 수군은 전투 능력이 우수한 판옥선과 사정거리 1km이상의 화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정의 지시는 한마디로 수군을 폐지하라는 것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고식적인 방안을 마련한 것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판단한 바와 전혀 다른 조정의 지시에 대해 바다에서 적을 물리쳐야 함을 건의하였다. 이순신이 주장한 건의의 요지는 일본군이 바다를 통해 침입해 올 것이므로 예상되는 해로를 차단하여 우리의 우수한 선재 화포를 이용하여 방어할 경우 전쟁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어떻게 하여 이러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이순신은 당시 수시로 왜구들에게 납치되었다가 탈출해 온 사람들을 통해 일본의 정세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전의 왜구침입사례를 분석한 후 우리 수군이 준비만 잘하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순신 사고의 기저에는 일본군이 일단 육지에 상륙하면 승리하더라도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백성들에게 집중될 것이라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이순신의 과감한 건의로 수군은 존속될 수 있었다.

그러나 16만여 명의 막강한 전력인 일본군의 부산포 상륙을 당시 각 지역으로 흩어져 있던 수군전력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제한적 억제력을 발휘하였다. 그 방안으로 우선 일본군을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적이 감히 우리 수군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시위하였다. 이를테면 1592년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만 총 16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적선 340여 척을 격파하였다. 일본군은 더 이상 조선 수군과 싸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성을 쌓고 방어위주로 전략을 수정하였다. 그 결과 곡창 전라도가 보존됨으로써 조선은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전쟁 억제를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1593년 중반부터는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교섭이 진행되었다. 이 시기 이순신은 본직인 전라좌수사에다 삼도수군통제사를 겸직하면서 적이 침범할 수 있는 수로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전략기지를 건설하였다. 그것이 바로 한산도 삼도수군통제영이었다. 그러면서 수군전력을 증강시키기 위해 매진하였다. 전선 250척만 보유할 수 있다면 어떤 경우에도 일본군의 조선 해역 이동을 차단할 수 있다고 보고 당시 보유전력의 2배 규모를 이루기 위해 전력 증강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렇지만 당시 흉년과 전염병으로 수군 전력이 크게 감소되어 목표를 달성할 수 없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의 노력으로 결국 180여 척의 전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전력증강에 힘쓰는 한편으로 15972월 통제사직에서 교체되기까지 약 4년간 일본군의 해상서진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이순신의 제한적 억제력은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이순신의 전쟁억제를 위한 노력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사고를 발휘한 결과이다. 이순신은 어떻게 해서 이런 혁신적인 사고를 보였을까. 이순신은 어릴 때 유학을 공부하면서 충···민본주의 사상을 형성해 나갔다. 21세에 결혼한 후 무과를 준비하면서 수많은 병법서적의 탐독을 통해 병법에 대한 전문지식과 리더가 가져야 할 요건을 갖춰나갔다. 32세에 무과에 급제한 후부터 다양한 보직을 통해 쌓은 실전경험으로 리더십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 중 45세에 정읍현감직을 수행하면서 백성을 다스려 본 경험은 그의 독특한 애민리더십을 형성하는 계기도 되었다. 한편으로 이순신은 언제나 자신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모범이 되는 생활을 견지함으로써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들이 국가 위기 상황을 맞아 자연스럽게 그의 혁신적 사고를 발휘하게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엄청난 변혁의 시대를 맞고 있다. 70년간 지속되어 온 안보적 정체성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일들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이는 우리가 추구해 온 안보관에 큰 혼란을 주면서 기존 인식의 틀을 깨트리고 있다. 그렇지만 군은 언제나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다는 숭고한 존재목표를 잊어서는 안된다.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능력을 항상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변화에도 흔들려서는 안 될 국가 방위의 최후 보루가 군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474년 전에 태어나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우리의 영웅 이순신장군이 주는 교훈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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