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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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10월호 국군의달 특집 ] 수호천사, 국군에 바란다
2019.11.01 Views 984 관리자
수호천사, 국군에 바란다
- 소 미 희-
인생을 살아가며 누군가 뒤에서 지켜봐주는 존재가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안정감과 도전의식에 큰 차이가 있다. 어릴 적 자전기타기와 비교해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아빠가 잡아줄 테니 마음 놓고 타” 라는 소리에 넘어질 것 같아 멈칫거리면서도 뒤뚱거리며 믿고 자전거를 탈 수 있었던 아이들은 자전거라는 탈 것이 안정적인 것, 재미있는 것이라는 기억을 가지며 성인으로 자랐다. 반면, 누구도 잡아주고 밀어줄 사람이 없었던 아이들 중엔 아예 시도 자체를 포기했거나 시도했다가도 두려움 때문에 반복하지 못해 자전거란 위험한 것, 두려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성인이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와 유사한 경험들을 한다. “넘어져도 괜찮아,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으니 마음 놓고 시도해 봐”라고 말해주는 누가 있을 때의 도전과 그렇지 못한 경우의 도전은 시작부터가 다르다. 안정감으로 시작하는 것과 불안으로 시작하는 것의 차이는 과정과 결과에서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안정감을 갖고 시작하는 일들은 그에 걸맞는 일들을 끌어오고 더욱 더 안정적인 감정을 갖게 되고 반대의 경우는 불안할 일들을 끌어와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아마 그러한 안정감, 또는 신뢰감을 갖고 싶어 사람들은 가족을 만들고 친구를 사귀고 동아리에 들어가는지 모른다. 혼자라는 외로움과 막막함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고 싶어서 믿어주고 응원해주고 격려해주고 기다려주는 소울메이트를 찾아다니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자신이 안정적이지 못하면 불안한 사람들이 다가오고 불안할 일들을 끌어온다. 따라서 우선은 나 자신이 안정적으로 있어야 한다. 어쨌든, 내가 안정적이든 불안해하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그리고 관계엔 사랑과 평화와 협력과 조화도 있지만 미움과 갈등과 불신과 부조화도 있다. 엄밀히 말해 그러한 미움과 갈등과 불신과 부조화는 다 나로 비롯한 것이지만, 그러한 나일지라도 온전히 인정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면 마음이 따뜻해지지 않을까? 우연히 원하지 않는 관계를 맺고 그 관계로 갈등하고 힘들어할 때라도 언제나 내편이 되어주며 “괜찮아” 해줄 누군가가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 누군가가 항상 나랑 같이 짝이 되어 다닌다면? 상상만으로도 든든하고 기쁘지 아니한가.
이렇듯 지켜봐주고 응원해주고 믿음을 주는 존재를 우리는 흔히 ‘수호천사’라고 한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 ‘부처님’ 이라고 할 수도 있고, 조상들의 영혼을 믿는 사람들은 ‘조상님’이라고 할 것이며 내면의 힘을 믿는 사람들은 ‘내 안의 무한한 힘, 지니’라고 할 수호천사! 어쨌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저마다의 수호천사를 의식하며 살아간다. 덕분에 좌절을 딛고 또 다시 도전할 용기를 내어 시도하고 도전하며 성장, 발전해나간다. 필자 역시 매일아침 눈을 뜨자마자 수호천사를 의식하며 감사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이렇게 건강히 숨을 쉬며 눈을 뜰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보이지 않게 나를 지켜주는 00님 대단히 감사합니다.”라고 나의 수호천사에게 감사기도를 드리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그냥 아무런 의식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루틴으로 삼고 매일 수호천사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시작하는 것과는 하루의 질이 달라진다는 알기에. 내 뇌에 첫 신호를 ‘수호천사’ ‘감사’를 보냈기에 하루 종일 나는 좋은 기운 안에서 보호받으며 감사할 일들을 경험한다.
10월은 첫 날부터 ‘국군의 날’이다. 하루의 아침이 특별한 출발의 의미가 있듯이 한 달의 첫 날도 필자에겐 특별하다. 매일의 아침처럼 나는 오늘, 시월의 첫 날을 수호천사에게 감사하며 시작한다. 내 안에 항상 있는 나의 내면의 무한한 힘에 감사하며 시작한다. 아침인데다 첫 날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감사는 배가 된다. 정신적, 정서적으로는 항상 보이지 않는 수호천사의 도움을 의식하고 느끼고 살아왔지만 실제로 나의 신상을 안전하게 해주는 옷, 집, 제도, 법 등에 대해선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온 내게, 오늘은 ‘내 일상의 안전을 지켜주는 실재하는 수호천사는 얼마나 될까?’가 퍼뜩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 부모님, 지니 외에 군인들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필자의 아들은 군복무 중이었다. 그동안은 엄마라는 역할 때문인지 아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보다 내가 밖에서 군에 있는 아들을 보호한다는 느낌이 컸던 시간들이었는데, 아들이 제대하고 나니 생각이 바뀐다. 내 아들 또래의 군인들, 아들 같은 아이들의 집단인데도 ‘군대’라는 단어와 ‘군인’이라는 단어가 은근히 울타리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고 할까, 물리적 차원의 수호천사라는 느낌이 들며 안도감이 든다. 사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관계이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무의식 차원에선 서로 연결되어 있어 누군가가 불안해하면 같은 장소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가족들, 친구들도 불안을 느낀다. 반대로 사회에 있는 가족, 친지들이 불안해해도 마찬가지로 군대에 있는 아들, 동생, 혹은 오빠, 친구가 불안해진다. 그러니 지금 내가 편안하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안정감을 주는 수호천사 역할을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존재들이다. 국경을 나누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깊이 들어가 보면 상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그러니 모두가 수호천사다.
다양한 무의식들이 모여 있는 군대라는 조직은 특별히 서로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겠다는 의식이 필요하다. 나의 평안이 너의 평안으로부터임을 알고 나의 불안이 너의 불안으로부터라는 걸 알면 너, 나를 가르며 배척하고 갈등하고 미워할 일이 없어진다. 너는 나의 거울이다. 너를 통해 나를 성찰한다. 그러한 성찰이 이루어지는 순간 세상은 천국이 된다. 날개 단 하늘의 천사만이 아닌 내 생활 곳곳에 함께하는 수호천사를 나는 어떻게 알아차리고 바라볼 것인가?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