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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지 10월호 권두언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할 때다`

2014.10.06 Views 2196 관리자

근본적인 문제에 도전할 때다

() 육군대장 김 재 창

 

1. 1970년대의 국군:
1971년 늦은 가을, 그때까지 서부전선을 맡아주었던 미군 사단이 철수하고, 한국군이 그 임무를 인수하던 때의 일이다. 그날 밤 한국군 교대 부대가 자유의 다리를 건너 전초진지(GOP)로 들어가고 있었다. . . 양국군이 부대교대를 하는 장면이다. 나는 피 교대 부대의 작전주임인 미군 소령과 같이 자유의 다리 남쪽 문에 서서 도보로 다리를 건너가는 부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자유의 다리는 경의선 철교 위에 촘촘하게 침목을 깔아서 차량과 보병이 건널 수 있게 개조한 임시 교량이었다. 그래서 간간이 볼트가 풀린 곳을 밟으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이 흔들린다. 그 위로 군장을 맨 보병들이 기침 소리도 없이 조용히 다리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이 축선은 북괴군이 서울에 이르는 최단 접근로다. 우리가 이 지역의 방어 책임을 인수하면서, 그때부터 한국군이 전 전선을 담당하게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행군하는 장병들의 외모만 보아도, 이들이 어떤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끄러미 그 장면을 보고 있던 미군 소령이 내게 다가와서 했던 말을 잊을 수 없다. “한국군 정말 훌륭하다!” “이런 부대라면 어떤 적과 싸워도,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겠다.” 나는 그의 찬사가 가슴에서 울어난 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 깡통군대 (Hollow Army)
그 무렵 미국은 월남 전역에서 고전을 하고 있었다. 첨단 장비와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었지만, 정글 속에서 게릴라를 찾아 싸우는 전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일반적으로 군이 전장에서 적을 이기지 못하고 희생자가 늘어나면, 우선 사기가 떨어진다. 사기가 떨어진 부대는 군기를 유지하기 어렵게 된다. 지휘자와 병사 간에는 불신이 쌓이고, 때로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발전한다. 심지어는 작전 중에 미워하는 지휘자를 수류탄으로 공격하는 이른바 ‘Fragging’ 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고 있었다. 실제로 69년에서 71년 사이에 수사기록에 의하면, 주월 미군 중에서, 수류탄을 사용하여 하극상을 한 사건이 800건에 달하였다.

월남전의 여파는 주월미군에 국한된 문제로 끝나지 않았다. 당시 주 유럽 미군사령관이었던 Frederic Kroesen 장군은, 미군이 깡통군대(Hollow Army) 가 되어 버렸다고 한탄했다. 그때에 독일 주둔 병사의 경우, 탈영이나 범죄에 연유되어 입건된 병사가 12% 에 달하였다. 심지어 어떤 부대에서는 병사들 간에 범죄조직(soldiers gang) 이 형성되어, 병영 내에서 금품을 강탈하거나 잔인한 가혹행위를 하면서 위계질서는 무너지고, 거의 폭동에 버금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유럽주둔 미군의 40%가 마약(drug)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고, 그중 Heroin 에 중독된 병사가 7%에 이르렀다. 실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2사단 부사단장을 지낸 Scales 장군은 이런 현상이 당시 사회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병영에서 이렇게 군기가 문란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당시 미국 사회 내에서 질서가 무너진 것을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젊은이들 간에는 월남전 참전에 대하여 집단적으로 반대하는 투쟁이 만연해 있었다. 한 마디로 그들은 그런 전쟁에 가고 싶지 않았다. 결국 군은 할 수 없이 자질이 떨어진 자원을 모집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모병의 40%가 고졸 이하의 자원이었고, 그나마 41% 는 적성검사 에서 가장 하위수준인 IV 급에 해당하는 자원이었다. 이런 수준의 자원으로는 높은 수준의 훈련은 엄두를 낼 수도 없었고, 기본적인 군기를 유지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3. 소중한 충고:
주한미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번은 전투 장비를 운전하여 탈영한 병사가 있었다. 미군 지휘관이 지역 내의 한국군과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수습되었다. 군부대에서 탈영병이 발생하는 사건은 어느 나라 군에서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투 장비를 몰고 탈영한다는 것은 상상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정말 이해할 수 없어서, 도대체 이런 사건이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때에 그 병사를 지휘했던 미군 지휘관으로부터 긴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미국사회로부터 모병한 청년들을 훈련시켜서 전투태세를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짐작 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그가 들려준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귀담아 들었어야했던 대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고도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분위기도 급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변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미군 장교의 견해로는, “10년 내에 한국군 에서도 자기들이 겪고 있는 사건들과 비슷한 어려운 일을 겪게 된다.” 는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한국군에서는 절대로 그런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군의 정신자세가 그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근 반세기가 지나갔다. 지금 우리 군이 처해있는 근무환경은 1971년 선배들이 자유의 다리를 건너던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달라졌다. 어쩌면 그 무렵 미군들이 겪고 있었던 수준에 버금가는 어려움을, 나름대로 극복하면서, 우리 국군이 오늘의 전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생각해 보니, 그때에 우리가 미군장교의 충고를 겸허히 받아들여 장차 닥칠 우리군의 지휘환경이 변화할 것에 대비하여, 선배들이 미리 대책을 마련해 두었어야 마땅했다는 자성(自省)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을 남의일 말하듯 사건모양만 침소봉대하면서, 실제로는 아무 걱정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군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온 국민이 힘을 합쳐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선진 국군으로 탈바꿈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보다 먼저, 사실은 우리보다 훨씬 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던, 미국정부와 미군의 경험을 들어보고 싶은 것이다.

4. 미군의 개혁:
197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 작심하고 추진했던 15년의 군() 개혁이, 그 당시, 스스로 깡통군대라고 탄식했던 미군을, 1990년대 Gulf 전에서 보여준 승리의 군대로 거듭 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개혁에 착수했던 1970년대 초, 미군의 입지는 참으로 비참한 상태였다. 병영 내에 질서가 무너져서 흑백 싸움이 벌어지고, 그 싸움이 기지촌 밖으로 번져나가 군인가족을 공격하는 사건이 도처에 일어나고 있었으니, 미국 사회 내에서 군의 입지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 미육군총장이 Abrams 장군이었다. 그가 받았던 주변의 눈총이 얼마나 따가웠는지를 우리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보고 있었다. 군이 싸워서 이기려면 끊임없이 진화해야한다. 전장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견해로는, 월남전의 여파로 인해 군의 기강이 무너진 것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동안 군이 현대전에서 싸워 이길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에 우선하여, 그때가 바로 미군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개혁의 목표는 적과 싸워서 반드시 이기는 군대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를 향해 미국군의 모든 역량을 다 쏟아 부었다.

돌이켜 보면, 만약 그때에 미군의 개혁목표가 마약추방이나, 인종차별을 해소 하는 것 정도였다면, Gulf 전의 승리는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병영 내에서 범죄와의 전쟁에 군 수뇌부가 붙들려서, 끌려 다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군의 수뇌부가 근본적인 개혁을 하겠다고 일어섰을 때에, 미군의 인사 기능은 과감한 정군작업을 단행 하였다. 병영 내에 만연된 마약 사범을 퇴치하고, 범죄조직(gang )을 과감하게 소탕하고, 병영내의 기강을 확립하였다. 당시 유럽에 주둔했던 미군은 약 4개월에 걸쳐 1300 여명의 범법자를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미군이 추진한 본격적인 개혁은 싸우는 방법을 개혁한 것이었다. 기술이 발달하여 새로운 무기가 등장할 때면, 의례히 새로운 전술과 새로운 전투기술이 등장한다. 현대무기의 사거리는 길어졌고, 정확도는 놀랄 만큼 향상되었다. 적군과 아군이 공히 치명적인 무기를 장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1973년 제 3차 중동전은 이런 기술 환경의 변화가 전장에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미국의 장교단은 싸우는 방법을 대폭 개혁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먼저 교리를 개혁하였다. 공지작전 개념이 이때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리고 새로운 훈련방법을 도입하였다. 과학화 훈련장(NTC)이 만들어지고, 전문 대항군을 상대로 실전 같은 훈련을 시작 하였다. 그것은 장병들이 실제로 피를 흘리지는 않으면서도, 실전과 같은 전투경험을 하게 해 주었다.

전장모의 기법(Simulation)을 이용한, 간부훈련 방법을 도입하였다. BCTP (Battle Command Training Program) 는 간부들에게 전투지휘 기법을 훈련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대령이상 고급장교들에게 전투지휘 기술을 키워주려면, 훈련 중에 그들의 실수를 누군가 지적해 주어야한다. 미군은 그 임무를 예비역 장군들에게 맡겼다. 현대전에서 합동성은 승패를 좌우한다. 군의 개혁을 지켜보던 의회가 1986Goldwater-Nichols 법을 통과시킨다. 합동성을 강화하기위한 제도적 뒷받침을 해준 것이다.

그것과 병행하여, 현대전에 필요한 주요 전투 장비를 제작하여 장비하였다. 에이브람스 탱크, 브레들리 장갑차, UH-60 블렉호크, UH-64 아파치, 그리고 페트리옷 미사일 등이 그때 도입한 대표적인 장비들이다. 이 개혁이 1980년대 말까지 이어졌다.

Gulf 전은 개혁을 거친 미군이 처음으로 적과 싸웠던 전장이었다. 미군의 승리는 충격적이었다. 미국 상원이 참전했던 사단장을 불러서, Hussein 의 부대가 나름대로 정예부대였는데, 어떻게 100시간 만에 이길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사단장이 명답을 남겼다. 미국군은 이 전쟁을 100시간 만에 이긴 것이 아니라, 사실은 15년 걸려 이룩한 개혁의 승리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1970년대에 미군이 깊은 수렁에 빠져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들에게 Gulf 전의 승리는 작전의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국군 장교단의 머리에서 짜 낼 수 있었던 Idea 는 다 짜내어, 15년 동안 일관되게 추진했던 끈질긴 개혁의 승리였기 때문이다.

5. 국군의 개혁:
지금 우리 국군이 온갖 어려움을 다 겪고 있다. 징집자원이 모자라 적성검사에 미달하는 자원을 수용해야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병영의 문화가 무질서한 사회의 영향을 받아 중심을 잃고 표류하는 현상은 보기에도 안타깝다. 때로는 주변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풀어가는 것, 그 자체가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군의 사기가 떨어지고, 도처에 군기가 빠진 모습이 들어나고 있지만, 사실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수면 하에 잠복하고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한다. 군은 적과 싸워야할 때에 싸워서 이기기 위해 존재한다.

그동안 현대전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지속적으로 진화하지 못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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